신앙공동체 '테제'를 가다
신앙공동체 '테제'를 가다
[중앙일보]입력 2013.06.11 00:22 / 수정 2013.06.11 13:49
(상) 국경을 넘는 영성의 비밀
침묵의 기도, 짧은 찬송…오직 신만을 대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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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화, 즉 영성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국경·교파를 초월한 세계적인 기독교 신앙공동체로 이름난 프랑스 테제공동체를 다녀왔다. 내 편 네 편 가르는 분열이 없는 화해와 일치의 영성 공간이다. 그 현장을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지난달 22일 오후 프랑스 중동부의 작은 도시 마콩. 1시간 반 전 파리의 리옹역을 출발한 테제베(TGV)에서 내리자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한 청년이 ‘테제(Taize)’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 안내판을 들고 서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 안드레아다.
그는 이곳 ‘테제 공동체’의 장기 체류자다. 1년간 머물기로 하고 공동체 운영을 돕는다고 했다. “안내판이 효과가 있었다”며 미소를 짓더니 “일행이 있다”며 소개한다. 같은 열차를 타고 막 도착한 중남미 출신 젊은 남녀와 안드레아처럼 장기체류 중인 20대 초반의 러시아 여성 나타샤다.
마콩역에서 공동체까지는 안드레아의 승용차로 30분이 걸렸다. 차에서 내리자 프랑스 출신 브누와 수사(brother)가 환한 얼굴로 반긴다. 한데 공동체는 조용한 수도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10대 후반의 독일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얼핏 캠핑장 같았다.
프랑스 작은 마을, 한 해 방문객 10만 명
공동체를 찾은 기간은 마침 펜테코스트(Pentecost), 성령강림절 기간이었다. 부활 이후 승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성령을 내려 보내 구원의 메시지를 재확인한 사건이다. 기독교 국가인 독일에서는 일주일간 휴가라고 한다. 그 기간을 이용해 젊은이들이 공동체를 찾은 것이었다. 독일에서만 2000명, 다른 나라에서 온 500명을 합해 모두 2500명의 방문자가 공동체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젊은이들은 골칫거리다. 교회에 냉담한 이들이 늘어서다. 유럽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한다. 그런데 테제는 정반대다. 비결이 뭘까.
공동체는 스위스 출신의 로제(1915∼2005) 수사가 1940년 창설했다. 아버지가 개혁 교회의 목사였으나 어린 시절 가톨릭 가정에 보내져 성장한 그는 일찌감치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2차 대전 중에는 삶이 뿌리 뽑힌 채 떠도는 유대인을,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독일군 포로를 돌봤다. 당국의 허가를 받아 공동체에서 먹이고 쉬게 했다. 국적 초월이다. 이런 로제의 철학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공동체 식구가 차츰 늘었다. 그 중엔 가톨릭 수사도 끼어 있었다. 결국 로제 수사는 1949년 초교파 수도원 공동체를 선언한다.
현재 공동체는 30여 개국 출신 70여 명의 수사들이 꾸려 나간다. 가톨릭 수사는 물론 성공회 신부, 장로교·감리교·루터교 등 다양한 개신교 교단 출신의 신앙인들이 독신 서약을 하고 수사 생활을 한다.
공용어는 영어지만 하루 세 차례 기도 예배는 수사·방문자들의 국적을 고려해 서너 개 언어로 진행된다. 심지어 쓰레기통 안내문까지 대여섯 개 언어로 쓰여 있을 정도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저녁 기도에 참석했다. 60년대 초반 준공돼 증축을 거듭한 예배 공간인 ‘화해의 교회’는 최대 6000명까지 수용한다고 한다.
가톨릭·성공회·개신교 … 종교도 다양
오후 8시 37분. 한 수사의 낭랑한 음성이 예배당에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선율의 찬송가다. 저녁 기도의 시작이다. 테제 공동체의 영성적 특징은 단순히 국가와 종파를 초월해 신앙 안에서의 화해를 꾀하는 데 있지 않다.
한 번만 들어도 반할 만큼 감미로운 찬송가와, 정반대로 결코 쉽게 익숙해 지지 않는 침묵기도로 구성된 특유의 예배 방식이 트레이드 마크다. 골치 아픈 설교나 강론 같은 건 없다. 찬송으로 시작해 찬송으로 끝난다고 할 만큼 노래의 비중이 크다.
찬송가는 단순했다. 2분 가량의 짧은 찬송가 ‘Tu sei sorgente viva(You are the fountain of life·주는 생명의 샘)’는 서너 개의 이탈리아어 문장이 몇 차례나 반복됐다. 6분 가량의 ‘베니 상테 스피리투스(Veni Sancte Spiritus·오소서, 성령이여)’도 마찬가지. 단순한 가사·멜로디가 반복됐다. 그런데도 묘한 매력이 있었다.
찬송에 숨겨진 비밀은 따로 있었다. 브누와 수사는 “테제 공동체의 200여 찬송가는 모두 성경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소개했다. “짧은 성경 구절을 찬송가 안에 담아 반복해 듣게 함으로써 쉽게 집중력을 잃곤 하는 젊은이들이 성경 내용을 실제로 묵상토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침묵기도 순서. 8시 50분부터 정확하게 8분간 지속됐다. 침묵기도 중 특별한 요구 사항 같은 건 없다. 교회 안에 의자가 없어 바닥에 앉도록 돼 있기 때문에 2000여 예배 참석자들은 내키는 대로 자리를 잡았다. 발을 뻗고 앉은 중년 여인, 머리에 옷을 뒤집어쓴 채 엉덩이를 치켜든 기도 자세를 취한 여성, 심지어 기도 시간 내내 서로를 가볍게 애무하는 연인 신자도 있었다.
“교회 안 가는 젊은이들, 갈증은 더 커져”
간간히 기침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외국인과 함께 고요한 공간에 있기는 처음이다. 부자연스러운 침묵.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일까.
궁금증은 이튿날 풀렸다. 공동체에 입소하는 누구나 하루 세 차례 기도 참가는 필수다. 사람에 따라 오전엔 성경 공부, 오후에는 각자 주어진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은 공동체 운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청소·음식 준비 같은 것들이다.
23일 오후. 공동체 본부로부터 주어진 토론 과제를 수행 중이던 젊은이들 틈에 끼어 들었다. “찬송가는 훌륭한데 침묵기도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는 초심자의 고민은 쉽게 풀렸다.
독일 여성 에바 마리아(26)는 “테제에 오면 올수록 침묵기도가 만족스럽다”고 했다. “기도하려고 애쓰지만 상념이 떠오르면 그냥 그대로 둔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에 어떤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신(神) 만을 대면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그는 “16살 때 테제를 처음 찾은 후 이번이 25번째”라고 했다.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온 목회자 지망생 존 올슨(24) 역시 “거대한 군중 속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영성적인 어떤 걸 느낀다”고 했다. 그는 또 “바깥의 교회는 크게 분열돼 있다. 다양성 안에서 화해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테제의 매력인 것 같다”고 했다.
24일 아침 일찍 공동체를 나섰다. 공동체를 찾는 방문자 숫자는 계절별로 큰 차이가 난다. 여름엔 하루 6000명이 찾을 때도 있고 겨울에는 대개 100명 수준이라고 한다. 한 해 방문자가 10만 명이 넘는다.
스위스 출신의 리샤르 수사는 “과거에는 도시보다 농촌 청년들이 신앙에 더 적극적이었는데 요즘은 역전됐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기존 교회는 나가지 않는 대신 영적인 갈망은 더 커진 것 같다”는 거였다. 테제에서 그런 걸 느낀다는 얘기였다.
테제(프랑스)=신준봉 기자
일주일 머무르는 방문자 국가·나이 따라 체재비 달라, 자원봉사자는 숙식 무료
테제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다. 일주일간 머무르는 방문자와 1개월 이상 1년까지 머물며 기도하고 노동하는 자원봉사자들이다.
봉사자들은 노동한 대가로 숙식이 무료이지만 방문자들은 체재비를 내야 한다. 체재비는 출신 국가의 경제력, 개인 형편, 연령 등을 고려해 다르게 적용한다.
예컨대 미국·영국·캐나다·핀란드인 등에게 가장 많이 받는다. 30세 미만의 경우 하루 7∼10유로(약 1만∼1만4900원)다. 한국인에게는 6.5∼9.5유로(약 9600∼1만4000원)를 받는다. 멕시코인에게는 5.5∼8.5유로, 포르투갈인에게는 6∼9유로를 받는다.
하지만 한국인 신한열 수사는 “이런 분류는 큰 의미는 없다”고 설명했다. 체재비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내도록 하기 때문에 미국인보다 많이 내는 한국인, 한국인보다 많이 내는 포르투갈인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한국에서도 테제 공동체의 기도예배를 경험할 수 있다. 서울 화곡동에 공동체가 있다. 매주 금요일 오후 7시30분부터 9시까지 묵상 기도 모임이 열린다. 한국에선 ‘떼제 공동체’로 표기한다. 02-2606-7079.
신준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