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적 목회가 필요한 때입니다.(이동원 목사글)
관상적 목회가 필요한 때입니다.
-<두란노 목회와 신학- 가교 2001년 12月-이동원 목사>
현대문화의 한 특성은 속도(speed)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번의 클릭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소위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좀 더 편리한 문화를 향유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게 되면서 과연 이 바쁨이나 빠름이 곧 삶의 질적 의미를 생산 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쁘게 빠르게 살고 있지만 어쩌면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해부터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모은 책 중에 프랑스의 철학교수요, 에세이스트인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가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줄곧 시중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내지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켜 올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느림과 신속함이 벌리는 열띤 공방전의 세상에서 속도가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현대문화를 기소하는 검사역을 자처합니다. 오늘의 세상이 느림을 게으름이라고 정죄하고 있지만 그는 오히려 느림은 미덕일수 있다는 역설적인 강조를 합니다. 왜냐하면 느림은 우리가 만나는 한사람, 우리가 대하는 하나의 풍경, 낱낱의 사건을 관조적으로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아침마다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는 감동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저녁마다 어둠을 맞이하는 행복을 알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연못의 어두운 물과 밤이 뒤 섞일 때 그것을 느긋하게 들여다 보고 있는 자 앞에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밤의 얼굴을 지켜본 일이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속도문화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마음의 쉼의 상실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페이지를 들여다보면 이미 3세기에서 5세기를 거치는 사막교부(desert fathers)시대에 벌써부터 이런 속도문화의 비극을 예방하고 참된 마음의 쉼을 찾으려는 소위 수도원 영성 운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운동을 신비주의 운동이나 도피주의 운동으로 쉽게 단순화하려는 유혹을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사용되기 시작한 관상(contemplation)이란 단어는 단순한 현실도피를 위한 묵상의 의미로 씌여진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대하는 현실을 천천히 깊이 들여다보는 '관심의 집중'(fixed attention)이란 의미로 씌여져 왔기 때문입니다. 13세기에 이르러 이런 전통에서 관상이란 경건한 독서(lectio divina)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의 마음의 쉼의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관상적 목사"(The Contemplative Pastor)라는 책을 쓰면서 지금이야 말로 이런 관상적 태도를 통한 관상적 목회가 요청되는 때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이런 목회가 요청되는 것일까요?
첫째로,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목회를 되돌아 볼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한주 간의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제 칠일에 쉬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단순히 피곤하셨기 때문에 쉬셨다고 가정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가 일을 마치셨기 때문에 쉬셨다고 기록합니다.(창2:1-2) 그러나 이 마침의 의미는 그에게 더 이상의 할일이 없어진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분에게는 이제부터 그가 창조하신 만물을 돌아 보셔야하는 엄청난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의 그분의 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동안의 성취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한 단계의 창조가 끝날 때 마다 '좋다'라고 말씀하시던 그분에게는 좀더 집중적인 '자축의 시간'이 필요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 안 밖으로 신랄한 비판과 냉소를 직면해야하는 가슴 아픈 시간들을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많은 시행착오와 탐욕의 우를 범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한해를 마무리하고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 계절에 주께서 우리의 목양의 장에 부어주신 만만치 않은 그 풍성한 은혜를 기리는 감사와 찬미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축제의 마음이야 말로 우리의 다시 일어섬의 영성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여유 있게 그가 간섭해 오셨던 삶의 순간순간마다 베풀어진 그의 긍휼과 자비를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이런 여유가 탄생하는 마음의 자리를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관상의 마당'(Contemplative space)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둘째로,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목회를 새롭게 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안식의 가장 큰 이유는 피곤함 때문이 아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이 우리에게 피곤함에서의 회복을 제공한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에너지의 소모가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 소실된 에너지가 보충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나아갈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사역에서의 시행착오들은 이 에너지의 고갈상태에서 충동대로 결정한 사안들의 피흘림 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요즈음 조금씩 철이 들면서 초대교부 시대나 중세기의 수도사들이 사막으로 침잠해간 이유를 공감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이 바쁨의 목회를 뒤로하고 어디론가 잠적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바쁨의 목회의 한 복판에도 우리만의 사막을 만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잠시의 혹은 시시때때로의 조용한 침묵일수도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 목회자들이 모두 떼제 공동체의 신학을 동의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이 공동체가 강조하는 침묵(silence)의 영성을 공감하지 않을 동역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쉴새없이 떠들며 살아 왔습니다. 이제 잠시라도 입을 다물고 바쁘지 않은 모습으로 호흡을 고르면서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목회는 얼마나 달라질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모습을 "그가 쉬어 평안 하셨음이라"(He rested and was refreshed)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목회가 회복된다면 우리의 목회의 장은 진실로 치유의 새로운 장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셋째로,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목회를 새 창조 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결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드라마는 창2:3의 말씀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 후 다시 일하기 시작 하셨습니다. 그가 창조한 만물을 돌아보시고 인간을 구속하시고--그리하여 그의 안식은 미래를 새롭게 창조하는 시간이 되셨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새 창조(recreation)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의 장에 진정한 관상의 공간과 안식의 리듬이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날마다 새로운 창조가 숨 쉬는 공간일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겪어온 대부분의 고통은 졸속의 결과 혹은 기다리지 못한 성급함의 열매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기다리면서 기도하면서 생각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삶을 '관상적 삶'(Contemplative lifestyle)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관상적 리더십'이라는 단어도 씌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한날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초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앞에 나아온 사람들이고 더욱 부름 받은 목회자들은 이런 짐지고 사는 이웃들에게 주님을 소개하는 '상처받은 치유자'로 소명된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쉼의 선물을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쉼을 우리 내면에 먼저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밖으로의 여행'(outward journey)이 기백 있는 품위를 지니기 위해서도 이제는 먼저 우리네'안으로의 여행'(inward journey)이 깊음을 가져야 할 시간입니다. 끝으로 피에로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마지막 줄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태어날 것이다. 내일 나는 다시 한번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향해 손을 뻗을 것이다. 계절의 바퀴를 돌릴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모든 계절이 내게는 정겹고 아름답기 만하다. 나는 빛이 기울어 질 때 까지 빛과 동행할 것이고, 밤이 새벽에 의해 찢겨 나갈 때 까지 밤과 동행할 것이다. 누더기를 입고 있는 이 세상 난 이 세상에 위엄 있는 의복을 입혀줄 것이다. 아니 그 보다는 나의 참된 충동들을 알고 있기에 세상이 입고 있는 그 누더기들을 벗겨 낼 것이다. 그리고 내일 다시한번 나는 내가 아직도 살아있는 존재로 있을 수 있는 이 행복을 소중하게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