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Seminar

[한신별세세미나-19차]_영성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목회자의 영성을 회복하라: 오정현 목사)

샬렘하우스주방장 2013. 8. 9. 16:51

 

목회자의 영성을 회복하라

 

 

 

오정현 목사 (사랑의 교회)

 

 

사역은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무엇인가 닿아야 하고,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입니다. 후기 현대주의 시기입니다. 후기 현대주의 시기의 특성은 영성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까지는 계몽주의와 지성주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좋은 설교가 있는가? 또 어디에 아주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즉 사람의 어떤 지성을 꿰뚫는 무언가가 있는가? 이것이 큰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마술사, 논리와 깊이가 있는 지성을 감동시키는 것을 참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것이 필요합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제는 영성과 감성과 체험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21세기는 어디에 설교가 좋은 것이 있는가?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 좋은 예배가 있는가? 이것이 필요합니다.

어디에 좋은 예배가 있는가? 좋은 예배를 이루는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찬양입니다. 요즘은 굉장히 찬양이 중요합니다. 요즘 어른들 중의 많은 분들이 얘들이 왜 저 찬양을 좋아하는가? 의문을 갖습니다. 설교 중요하고 논리도 중요하고 다 필요하지만, 여러분 찬양을 통하여 소위 영적인 기름 부음, 성령의 터치, 마음의 부딪힘, 또 만져주심 없이는 안 됩니다.

사랑의 교회는 굉장히 지성적인 교회입니다. 옥 목사님 설교가 설교의 전형, 모델 아닙니까. 아마 우리 교회의 대학교수 모으면 종합대학 하나 차리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배 시작할 때 먼저 15분 동안 찬양합니다. 그 다음에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다 경배해/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드려 절하세/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하나님의 영으로 경배드리리 찬양하고, 그 다음에 창조의 아버지/그 섭리 보이사……주 영광 여기 임하사 열방 향해 그 빛 비추소서/주의 얼굴 구할 때 주의 은혜 임하소서/주의 능력 임하소서/주의 치유 임하소서/주의 기적 임하소서 하고, 영광, 영광, 영광, 영광 이것을 세 번 합니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는 아주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분들이 한 6개월 지나니 자기도 모르게 손 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립니다.

1, 2, 3, 4, 5, 6부 예배를 드리는데, 벌써 그 찬양 시간에 은혜 다 받습니다. 예배 시작 30분 전에 예배당에 들어가려고 난리법석이 납니다. 영성과 감성과 체험의 세계, 이 기름 부음이 있는 은혜가, 넘치는 은혜가 사랑하는 우리 동역자, 선배님들, 사역자들의 삶 속에 그대로 뿜어져 들어가길 바랍니다.

 

1. 사역의 현실

 

여러분, 우리가 영성에 대해서는 늘 관심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가 세상 강사들, 세상의 교수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영성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건강한 피곤, 파괴적 피곤이 있습니다. 건강한 피곤은 사역을 열심히 하고 애쓰고 수고하고 최선을 다하다가 생기는 피곤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무 애쓰고 수고하면 피곤한 법이고 잠도 못 자면 피곤합니다. 그러나 이런 건강한 피곤은 시간이 지나면 또 잠을 자면 해결이 됩니다. 엘리야처럼 쉬고 또 영양 공급을 받고 그러면 해결이 됩니다. 거룩한 피곤입니다.

그런데 파괴적 피곤은 심각합니다. 쉬어도 해결이 안 됩니다. 치유되지 않는 피곤입니다. 이것은 사역하면서 성도들이 상처를 받고 떠나간다든지, 치유되지 않는 감정들이 자꾸 쌓이는 것을 말합니다. 파괴적 피곤이 나타나는 증거 중의 하나가 목회적 돌봄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목양적 돌봄의 기회가 왔을 때 그냥 싫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굉장히 피곤하셨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은 죽겠다고 난리인데 곤히 주무셨겠습니까? 또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온 동리가 예수님께 모여서 예수님께 병 고쳐 달라고 아비규환을 이루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바쁜 가운데서도 주님은 한 번도 갑작스런 목회적 돌봄의 기회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소경이 와도, 38년 된 병자가 와도, 문둥병자가 어떻게 해달라 해도, 또 수가 성 우물가 여인에게도, 물론 주님이 일부러 찾아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하여튼 갑작스런 어떤 요청에도 주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회 규모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일단은 전화가 오면 가슴이 벙벙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 전화 좀 안 왔으면 좋겠다, 안 만났으면 좋겠다, 오늘은 심방 안 갔으면 좋겠다, 뭐 이런 식으로 피곤해서 목양적 돌봄의 기회가 왔을 때 좀 회피하는 마음이 있는 것, 바로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는 신호입니다.

또 하나, 목회를 하면서 상처받는 일들이 많습니다. 건강한 피곤이 아닌 것이 자꾸 축적되면 중독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포르노 또는 인터넷에 빠져 드는 것입니다. 중독 상태입니다. 목회자들 가운데 파괴적 피곤이 나타나는 상태를 보면, 미국 같은 경우, 이 상태가 지속되면 표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독재를 한다든지, 고집을 부린다든지 평균 1/4이 십계명 중 7계명을 범했다고 합니다. 음란물, 또는 아내 이외의 여자와 관계를 갖는다든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대로 된 영성을 유지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처음에 받았던 소명이 흔들리고, 비전이 흔들립니다. 자연적으로 영적으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2. 비전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몇 가지 현상

 

(1) 기도 제목

 

교회적으로 영적으로 은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기도 제목에 차이가 있습니다. 기도 제목에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평양 부흥을 앞에 놓고 100가지 회개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는데 가슴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1907년 1월 15일 평양 부흥의 100주년, 길선주 목사님이 회개한 날로 2007년을 잡는다면 지금 D-day 590일 정도 남았습니다. 그 기도 제목들을 보면,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나 개인의 영성이 제대로 된 집중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나타납니다.

 

(2) 평상시의 삶의 간증

 

일상에서의 살아 있는 간증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평범한 삶 속에 영성이 있는 교회냐 아니냐, 개인의 영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 옥한흠 목사님의 장학재단이 출범했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가운데,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의 철학을 어떻게 하면 잘 계승할 수 있을까? 하는 동기에서 시작했는데 1년 동안 38억 4천만 원을 모았습니다. 정말 큰 은혜입니다.

어제 정근모 명지대학 총장님이 오셔서 축사를 하셨는데, 다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이분이 홍석현 주미대사가 스탠퍼드 대학 가실 때 추천서를 써 드렸답니다. 그런데 이번 봄에 워싱턴에 잠깐 가셨는데, 홍 대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꼭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답니다. 누구를 모시고 와도 좋다고 해서 미국 워싱턴의 중앙장로교회 이원상 목사님과 같이 가셨답니다. 왜냐하면 이원상 목사님도 홍석현 주미대사를 만나고 싶어했는데 우연히 기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화요일 낮에 주미대사 관저에서 식사를 하는데, 오찬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원상 목사님이 주미대사에게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미대사님, 예수님을 아십니까?

저도 성경공부를 해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못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 대해서 확신이 안 갑니다. 그러자 이원상 목사님이 그 맛있는 오찬을 앞에 두고 하나도 안 드시고 계속 예수님만 전했답니다.

어제 그 이야기를 듣는데, 이것이 바로 일상에서의, 평범한 삶에서의 간증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늘 교회에서 왔다 갔다 해야 합니다. 평범한 삶에서, 일상적인 삶에서 간증이 있는가 없는가? 여기에서 영성과 소명과 비전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3) 불만의 내용과 질

 

교회 교우들이나 나 자신의 불만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해서 불만인가? 교회에서 교육부가 부족하다, 직분을 안 줘서 불만이다 이런 식으로 불만의 내용과 질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교회, 죽은 교회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교회의 기도 제목, 평상시의 삶의 간증, 불만의 내용과 질을 살펴보면서 내 교회가 살았느냐 죽었느냐, 아니면  내 영이 살았냐 죽었냐 이런 고민들을 해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내 영성을 방해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성공 자체가 내 영성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한다거나 내가 영적으로 은혜를 받았다 하는 그것이 오히려 방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계속적인 실패가 방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피곤한 삶 자체가 영성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런 세미나에 오셔서 기도도 하시고 자신을 추스르는 가운데 다시 한번 이 시대를 향하여 쓰임받는 진정한 영성 회복이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갤럽 여론 조사에서 나온 한국인의 종교실태 조사를 보셨습니까? 전에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1.4%였는데 지금은 4.2%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 타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78%입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야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친구들 가운데 이슬람 지역에서 지금 선교하는 분들 또는 교회의 모슬렘권 전문 사역자, 서울대 동양사학과 그리고 한양대학교 모슬렘권 전공 교수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슬렘 지하드(성전)에서 자살 특공대를 뽑으면 지원하는 사람의 지원율이 50:1이랍니다. 그러니까 100명의 자살 특공대를 뽑는데 5,000명이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은 4,900명이 떨어지는데 목숨을 건져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울면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 야성에 지금 우리가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모슬렘권 이슬람 전임 선교사가 100만 명입니다. 전 세계 개신교 선교사가 20만 7천 명입니다. 게임이 안 됩니다. 영국은 지금 모슬렘에 다 먹히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모슬렘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적 신앙의 야성과 영성이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주여, 다시 한번 은혜를 주옵소서, 다시 한번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민족에게 임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다시 한번 회복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3. 교회사의 일곱 가지 영성의 흐름

 

그러면 우선, 지나간 2천 년 교회 역사 가운데 영성에 관한 흐름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정리한 후 요한복음 7장에 나타난 성령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최근 이 시대의 흐름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미국은 소위 네오콘(neocons) 신보수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현 미국의 정권을 쥐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진영을 신보수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럽 쪽은 소위 사회주의적 성향이 많고, 아시아는 소위 민족주의적 성향이 많습니다. 아프리카는 소위 부족주의적 성향이 많다 해서 지금도 르완다, 우간다 등 부족을 중심으로 잔혹한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은 지금 유럽 쪽의 사회주의적인 면과 민족주의적인 면이 합쳐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누가와 마태의 시각은 확실히 다릅니다. 마태는 갈릴리를 바다라고 했고 누가는 갈릴리를 호수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왜 누가는 갈릴리를 호수라고 하고 마태는 바다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누가는 지중해를 본 사람입니다. 지중해를 본 누가는 갈릴리가 호수 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중해를 보지 못한 마태는 갈릴리가 바다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세미나에 오셔서 전체를 보는 흐름을 갖게 되면 여러분들의 시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보는 시각이 달라지면 여러분들이 결정하고 결단하는 방향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영성의 흐름을 말씀 드리고 세계사적 흐름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지나간 2천 년 교회사의 영성의 흐름은 어느 것 하나만을 강조할 정도로 그렇게 얄팍하지가 않습니다. 교회사 전체적인 영성의 흐름을 보면서 내가 가진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7장 37~38절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지난 2천 년 교회사의 영성은 일곱 가지의 다양한 흐름이 있었습니다.

 

(1) 묵상을 강조하는 영성

 

수도원적인 영성입니다. 이것은 현실세계에서 도피하여 수도원에 들어가서 자신을 추스르는 것을 말합니다. 영성은 지금도 계속해서 흘러오고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 목회에다가 이 영성에 대해서 20~30페이지 정도 따로 써 놓은 것이 있습니다. 참고하십시오.

 

(2) 성결한 삶을 강조하는 영성

 

거룩한 삶입니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와 홀리 클릭 같은 경우 특별하게 거룩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를 척결하고 거룩한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에 이르는 어떤 특별한 방법들을 계발했습니다. 감리교 같은 경우 거룩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거룩한 삶에 이르는 길, 그래서 자신을 추스르는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영성, 거룩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뜻이 바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3) 성령을 강조하는 영성

 

성령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을 강조하는 영성은 오순절 운동으로 이어졌고, 제2의 축복으로 성령의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4)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영성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부터 시작해서 현대 구호기관 월드비전에 이르기까지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영성입니다. 이것이 한때 1970년대 인권운동 하면서 도시산업선교도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고민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미국이 갖는 제일 큰 신학적 고민이 뭐냐 하면 복음주의 교회가 사회적인 약자와 소외된 자, 여성, 구조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큰 이슈입니다. 마치 사회의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장애인, 여성,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 같고, 사회 구원, 사회복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적을 그대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을 믿는 사람들, 즉 복음주의자들은 우익, 가진 자, 있는 자들의 편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괴리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고민입니다.

복음주의자, 성경의 기적과 성경의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대로 믿으면서도 사회의 약자,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잘 섬기는 균형 감각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저는 대형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서 이것이 큰 숙제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면서도 어떻게 예수님의 대명령, 대계명인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를 실천하면서 이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할 것인가, 힘들어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돕고 섬길 것인가,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 균형 감각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가 고민입니다. 이것도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의 대사명과 대계명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그래서 우리 교회는 요즘 이 두 가지가 기도 제목입니다.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영성입니다.

 

(5) 말씀을 강조하는 영성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은 개혁주의적 전통을 통하여 말씀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Sola Scripture,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특권을 강조하고 가톨릭과 구별하였습니다. 가톨릭은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말씀을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개혁 신앙은 라틴어로 된 말씀을 일반 평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즉 말씀을 강조했습니다.

 

(6) 훈련을 강조하는 영성

 

로마 가톨릭의 특별한 훈련 방법들, 그래서 지금도 천주교 사제 훈련은 굉장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가톨릭의 대학을 빌려서 훈련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신부들이 방을 쓰는 것을 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충분한 어떤 여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주교 사제들은 개인 욕실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개인의 육신적인 안락을 누리면 안 된다고 해서 공동 화장실, 공동 목욕탕을 사용하고 개인 욕실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훈련합니다. 영성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7) 공동체적인 삶을 강조하는 영성

 

베네딕트회가 대표적입니다. 공동체적 삶을 강조하는데 지금도 캐나다, 프랑스에 공동체가 있습니다. 예수원 같은 경우도 공동체적인 경향이 많습니다. 이런 영성도 필요합니다.

이처럼 묵상, 성결한 삶, 성령, 사회정의, 말씀, 훈련, 공동체적인 것을 강조하는 일곱 가지는 거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가 어느 것 하나만으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묵상을 강조하는 영성이 좋기는 좋은데 지금 우리 현실세계의 필요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고, 자녀를 키워야 하는데……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성결한 삶 같은 경우는 죄 문제를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약화될 수 있습니다. 성령을 강조하는 삶 역시 은사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은사를 주신 분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회정의를 강조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인권과 정의의 강조를 위해 일하던 제 친구들이 지금 후회합니다. 우리가 너무 복음에 약했노라고. 또 말씀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개혁주의에는 강한데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약할 수 있습니다. 훈련을 강조하면 자신도 여전히 훈련을 받아야 할 양무리임을 잊을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런 모든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다 약점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여러분들이 인식하면서 무엇이 내게 부족한가? 어느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인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경우 여기에 비추어 내가 약한 점이 무엇인가 하고 보니까 저는 훈련, 말씀 이런 것에는 강한데 공동체적인 삶이라든가 성령 사역 같은 경우는 좀더 강화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제가 1970년대 후반에 4,5년 동안 대학생 사역을 하는 동안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원을 오가면서 성령운동에 눈을 뜨고 제 부족함을 메우는 작업을 했습니다. 사회정의 역시 하버드에서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짐 왈러드라는 잡지 편집장과 같이 고민하면서 제3세계의 악의 문제라든가 여성의 페미니즘 등 이런 것에 대한 약점을 보완하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균형 감각이 필요했는데,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애를 쓸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보완함으로 말미암아 균형된 영성과 야성을 가지고 딱 무장하셔서 여러분이 섬기는 사역지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4. 성령의 은혜(요 7:37~38)

 

요한복음 7장 37절 이하를 보십시오. 명절 끝 날, 이 날이 무슨 날입니까? 장막절, 초막절입니다. 장막절은 1주일을 하는데 마지막 시간에 실로암에서 물을 떠다가 붓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 물을 붓는 의식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상징합니다.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누구든지를 체크하십시오. 그 다음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지금 우리는 신약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약 시대를 살아갈 때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을 보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구약 시대의 성도들보다 현저한 복을 주셨는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구약의 성도들과의 차이, 사역자들과의 차이, 지금 다윗이나 삼손에 비해서, 구약 성도들에 비해서 큰 차이가 무엇입니까?

첫째, 누구든지는 성령 체험의 보편성입니다. 둘째, 그 배에서, 배라는 것은 성령 체험의 내재성을 말합니다. 셋째, 흘러나리라, 이것은 성령 체험의 충만성입니다. 이 세 가지가 구약 성도들에 비해서 신약 성도들에게 내리는 현저한 복입니다. 우리가 균형 감각을 가지고 받을 수 있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 은혜를 생각해 봅시다.

 

(1) 누구든지, 성령 체험의 보편성

 

성령 체험의 은혜는 누구든지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우리가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한 가지만 충족되면 됩니다. 제가 특별새벽부흥회를 하면서 교우들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것을 봤는데 딱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누구든지의 축복을 믿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하다는 그 확신을 믿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으나 우리는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 가지만 믿으면 됩니다.

성령이여, 오셔서 홀로 나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오셔서 홀로 나를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저를 80%만 장악해 주십시오. 요 10%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제가 해야 합니다. 이건 제 스타일로 해야 합니다. 유보해 주십시오.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놔두고 진심으로 전력투구해서 하나님, 나를 100% 장악하여 주십시오 하고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이것만 여러분들이 철저히 하면 성령은 우리를 장악해 주십니다. 누구든지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소원하시고 절규하시고 절절이 사모하시면, 하나님은 야박하실 정도로 안 된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런 면에서 야성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2) 그 배에서, 성령 체험의 내재성

 

내면의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물 같은 인생을 성령의 폭발력 있는 포도주로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물의 화학식은 H2O입니다. 포도주의 화학식은 C2H2OH입니다. 물리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근본부터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배의 세계는 욕심과 탐욕과 무절제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내면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적당한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내면의 변화입니다.

 

(3) 흘러나리라, 성령 체험의 충만성

 

성령의 역사는 충만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3~14절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그 속에서……샘물이 되리라.

야곱의 우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것이 이사야 58장에서 얘기하는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넘치는 것입니다. 한 방울, 두 방울이 아닙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메마른 사역자인지, 아닌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야성 있는 사역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솟아나는 샘의 사역자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흘러 넘치는 사역자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넘치는 사역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때 성경을 읽다가 밤을 새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할 때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지성인들은 반복하면 싫어합니다. 하지만 은혜가 제대로 오면 기술로 하지 아니하고 내 영이 성령께 부딪히고 있으므로 와 닿으면 열 번, 스무 번을 반복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은혜 있는 찬양 역시 열 번, 스무 번을 해도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찬양을 하면 천박하지 않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치유가 일어나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균형 있는 목회자, 야성을 지닌 목회자, 넘치는 목회자, 성령이 우리를 홀로 장악하는 목회자, 내면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목회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목회자에게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가 좌초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배가 뻘에 좌초되었습니다. 어떻게 살려야 합니까? 어떻게 다시 항해할 수 있습니까? 좌초되었는데 뻘에 내려가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내 몸은 점점 더 더러워집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은혜의 밀물이 몰려와서 그 배를 두둥실 띄우는 것입니다. 은혜의 만조가 밀려와서 두둥실 띄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밀물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간에 함께 띄우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원하시는 방향으로 몰려가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