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별세세미나-19차]_영성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관상의 영성, 행동의 영성: 이동원 목사)
관상의 영성, 행동의 영성
이동원 목사 (지구촌교회)
여는 말-관상이란 무엇인가?
지난 10년간 제 마음을 붙들었던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눈을 뜨든지 감든지, 이 두 단어가 지난 10년간 제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 목회의 두 가지 중요한 관심이었습니다.
첫째로 셀이란 단어였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놓고 고민하면서 ‘우리 교회가 부흥을 놓치지 않으면서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모색할 때마다 다시 돌아가 생각한 단어가 이 셀이란 단어였습니다. ‘셀 목회, 셀 공동체로의 변신이 아니면 한국 교회에 대답이 있겠는가? 우리 교회에 미래가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저희 교회는 셀 교회로 체질을 바꾸고 변신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복을 누려 왔습니다.
둘째로 관상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가 낯선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1년에 한 차례씩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관상기도 세미나를 해왔는데 관상기도를 한다니까 어떤 분이 제가 한 사람, 한 사람 관상 봐주고 기도하는 줄 알고 찾아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관상에 대한 제 마음의 관심이나 갈망이라는 것은 기도에 대한 제 갈증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30년이 이미 넘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고 최초의 15년 동안은 말씀을 찾아 헤맸던 목회라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내 목회에 있어서 성경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이것을 붙들고 최초의 목회 15년을 씨름하지 않았나 이렇게 평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 있어서 저는 귀납법적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또 강해설교의 영광, 본문에 천착해서 말씀을 삶 속에 적용하는 이 강해설교가 얼마나 귀하고 복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한 15년 동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회 15년이 넘어서는 어느 날부터 제 마음에 어떤 심각한 갈증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갈증은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기도하고 있는가? 기도라는 것이 내 목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저는 기도에 관한 한 계속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어떤 갈증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마치 기도에 관한 한 광대무변한 큰 대양, 출렁거리는 바닷가에서 촐랑거리기만 하는 내 모습이 자꾸 연상되고 ‘어떻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없을까? 하나님의 임재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흠뻑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고 목회를 할 수 없을까?’라는 기도에 대한 목마름, 기도에 대한 갈증이 저를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연구하고 기도를 공부하고 기도를 학습하고 기도를 훈련하다 보니까 또 기도에 관한 고대의 문서들, 교부들의 문서들을 뒤지게 되었고, 뒤지다 보니 자꾸 관상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무얼까, 저의 궁금증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책을 통해 어느 정도 그 단어를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참 부족했습니다. 마침 한 5년 전에 제가 안식년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관상이라는 여정을 체험해 보기로 작정하고 관상기도라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경험을 하면서 내 개인의 영성의 강이 정말 깊어지고 있다, 또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다, 또 목회자이면서도 나를 붙들고 있었던 어떤 분노 같은 것, 화 같은 것이 내 안에서 서서히 떠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편안히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관상이라는 영성을 체험하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행복해 한 사람은 제 아내였습니다. 제 아내가 지난 3년 동안 자주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당신, 많이 변했어요.”
사실 저는 개인적인 영성에 대한 목마름이나 욕구 때문에 이 관상을 찾아 나섰는데, 제가 그것을 체험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에도 적용해야겠다. 우리 교인들도 이것을 경험하면 얼마나 더 풍성해질까. 또 우리 교회에 조금씩 적용을 하면서 한국 교회가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기상조일지 모르지만 같이 나누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또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차례씩 이렇게 관상기도 세미나를 갖고 있습니다마는 지금은 그것을 다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고 조금 그냥 맛만 보여드리는 그런 시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관상이란 단어에 대해 정의를 해드리겠습니다. 바라볼 ‘관(觀)’자에다 생각할 ‘상(想)’입니다. ‘바라보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관상(觀想)이란 단어는 최근에 와서 갑자기 생긴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를 제일 먼저 썼던 사람은 2세기, 3세기에 살았던 앤토니라는 사람입니다. 성 앤토니. 그리고 이 단어는 무려 3세기부터 교회 문서에 나오기 시작합니다. 제가 관상이라는 단어를 정리하기에 앞서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관상이 아닌 것은 뭘까?’ 이것부터 명백하게 하겠습니다. ‘관상이 아닌 것은 무엇이냐?’
첫째, 관상은 동양 명상이 아닙니다. 동양 명상이나 참선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관상에 대해서 수용하기 어려운 생각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혹시 그것이 뉴에이지 영성이 아닌가? 혹은 다원주의 영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현대 관상기도 수련가 중에 다원주의적 경향이나 혹은 뉴에이지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최근에 와서 혼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전부터 존재했던 기독교 역사의 가장 오랜 강물에서부터 흘러 내려왔던 본래의 관상은 오늘날의 관상이라고 쓰고 있는 단어와는 훨씬 다르다는 것을 저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찾아내었습니다. 그러니까 관상은 동양 명상이나 참선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동양 명상이나 참선의 목표는 일종의 무념무상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무에 도달하는 것,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득도하는 것 이것이 일반적인 동양 명상, 참선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소위 관상이나 관상기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Union with God’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일치. 여기서 일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일치라는 단어도 결코 범신론적인 일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뭐, 내가 하나님이 된다든지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일치이며 영적인 일치입니다.
성경에서 이것과 가장 가까운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이것을 경험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동양 명상이나 참선이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둘째, 관상은 결코 카리스마적 은사가 아닙니다. 이것을 카리스마적 은사라고 정의해 버린다면 이것은 특별히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예컨대 중세기 수도사 같은 사람들만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관상이라는 토대에서 제가 관상QT라는 것을 만들어서 교인들을 훈련시키는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QT 훈련을 아무리 시켜도 QT를 배우지 못하고, 이론적으로는 배우는데 실제로 QT를 실천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참 많았는데 관상QT를 가르쳐 보니까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너무 쉽고 QT보다도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고백하는 교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누구나 마음을 열고 배우기를 원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결코 특별한 사람들만이,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하는 카리스마적 은사 형태의 기도 영역이 아닙니다.
셋째, 관상은 단순한 기도운동이 아닙니다. 물론, 관상에서 가장 중요한 형태는 기도운동입니다. 그러나 기도운동만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것은 이 관상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상적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관상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우리가 영어로는 관상을 ‘contempl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con이라는 단어와 temple(성전)이라는 단어의 결합입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성전은 성전일 수가 없습니다. con이라는 것은 함께, 하나님의 성전 안에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관상이라는 단어를 어렵게 이해할 필요가 없고 거부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관상을 관상이라고 번역했을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물론 더 나은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단어는 먼저 가톨릭이 썼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보편적으로 개신교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이렇게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관상에 대해 책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제목은 아마 ‘마음의 기도’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통성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통성기도는 한국 사람이 만들어낸, Made in Korea 기도로서 세계적인 것입니다. 저는 이 통성기도를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세계 많은 외국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통성기도 훈련도 시켜 봤습니다. 처음에는 참 어색해 합니다. 여러분, 이 통성기도는 한국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 모아 놓고 일제히 소리내서 같이 기도하라고 하면 정신이 산란해서 기도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집중하게 만들고 하다 보면 그것도 괜찮다 하면서 외국 사람들도 조금씩 배우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치열한 기도의 몰입, 집중, 거기서 느끼는 격렬한 카타르시스, 성령의 임재 등.
그러나 저는 통성기도에다가 관상기도를 가져와 좀 균형을 맞추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너무 통성기도만 시켜 놓으니까 한국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가끔씩 합니다. 통성도 하지만, 부르짖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은 침묵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깊은 침묵.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누군가가 “관상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침묵이다”라고 말했고, 또 “이 침묵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암호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 속으로 들어가는 암호가 바로 침묵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는 이 침묵이란 단어가 매우 낯섭니다. 소음에 익숙한 시대를 살다 보니까 갑자기 침묵하라고 하면 침묵이 아주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침묵하지 못합니다. 리처드 포스터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침묵의 한복판, 침묵의 깊은 한복판 거기에, 매우 고요하고 매우 평화스러운 곳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침묵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관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매우 풍요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관상은 기도를 넘어서서 우리의 삶을 관상적 삶으로 이끌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상이라는 단어를 정의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좀더 사전적인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은 “집중적인 바라봄이다”라고 합니다. 집중적인 바라봄보다 더 좋은 설명이 웹스터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관찰을 위해서 여백을 갖는 것, 공간을 갖는 것, 잘 관찰하기 위해서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 그것이 관상이란 이 말입니다.
본래 이 관상이란 단어는 contemplation에서 n자를 떼어낸 contemplatio란 라틴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원래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헬라어는 디올리아(theolia)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의 theory, 즉 이론인데 이 이론의 본래 뜻은 깊은 성찰을 말합니다. 깊은 성찰, 거기에서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큰 성찰.
관상이란 별 다른 뜻이 아닙니다. 깊은 바라봄입니다. 누굴 바라볼까요? 하나님을 깊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바라보고 깊이 경험하는 것, 이것이 관상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관상과 관상기도를 경험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인생을, 제 목회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에 대해서 개혁을 많이 말하는데, 새로워져야 한다,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관상기도를 하면 사람이 변하지 않겠는가?’ 이런 확신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1. 관상적 지도력의 필요성
(1) 현대적 지도력에 관상적 지도력의 보완 필요성
사실 요즘 서구에서는 관상적 지도력이란 단어를 최근에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이 단어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긴 역사를 통해 소위 리더십을 말할 때, 지도력을 말할 때 역기능적인 지도력, 필요하면서도 역기능적인 지도력으로 네 가지 이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지배(control)의 리더십
조정(컨트롤)하는 리더십입니다. 이것이 많은 역기능을 낳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완하기 위해 요즘 성경적 리더십을 많이 강조하는데 종으로서의 지도력, 섬기는 리더십입니다. 관상적인 리더십은 바로 종으로서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조정하고 이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바라보면서 상대방을 이해해주고 느껴주고 받아주고 섬겨주는 종으로서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② 경쟁(competition)의 리더십
얼마나 우리가 첨예하게 경쟁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교회끼리도 많은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참 부족한 것이 협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민족 복음화나 세계 선교는 결코 한 교단이나 한 교회가 해낼 수 없는 과제입니다. 우리가 협력을 배우지 못하는 한, 세계 복음화란 과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경쟁의 리더십을 뛰어넘어서 새롭게 협동하는 리더십을 배워야 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③ 효율성(efficiency)의 리더십
현대의 리더십은 효율성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시간을 아껴서 최대한의 결과를 창출해 낼 수가 있느냐?’ 그런데 지나치게 효율을 강조하다 보니까 효율성 없는 사람은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가 그것은 아니잖습니까? 목회는 효율성이 없는 사람도 붙들어 줘야 하고 끌어 안아야 하고, 세워야 하고, 그것이 목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효율성의 리더십을 보완하기 위해서 필요한 리더십이 있다면 긍휼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긍휼의 리더십! 불쌍히 여기고 받아주는 리더십, 힘들고 연약한 사람들을 더 품어줄 수 있는 리더십, 그것이 긍휼의 리더십입니다.
④ 집착(attachment)의 리더십
집착하는 리더십입니다. 우리가 효율을 창출해 내기 위해서는 어떤 일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부터 밤까지 매달립니다. 그러다 보니 여유를 잃습니다. 그리고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됩니다. 열심히는 하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거의 병자 비슷한 인간들을 현대 문화가 많이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저도 어느 날 그렇게 병들어 가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회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교회도 성장했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양해를 구하고 안식년을 좀 가졌습니다. 온전히 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식년을 얻었습니다. 안식년을 얻으면서 ‘어떻게 좀 제대로 안식할 수 있을 것인가?’ 안식에 대해서 공부하자고 마음 먹고 책 하나를 들고 안식년을 출발했습니다. 그 책이 「안식」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마르바 돈이라는 여성 영성 신학자가 쓴 책인데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본래의 제목은 「온전히 안식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가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사람들은 안식하지 못하는가?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이 왜 안식하지 못하는가?’ 거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안식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정말 안식 속에 들어가려면 하나님 되기를 그쳐야 한다.”
하나님 되기를 그쳐야 한다! 제가 충격을 받고 가만히 묵상에 들어가 보니까 그 말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안식년을 시작하고 내가 떠나면 교회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전화하고 이메일 체크하고 그리고 불안해서 또 전화하고 거의 신경 불안증에 걸린 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안식을 해도 전혀 안식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책에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 맞다. 내가 이렇게 안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교회는 주님의 교회인데 주님의 것이라면 온전히 드릴 수 있어야지.’ 그래서 책 읽다 말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 다 드립니다. 제 교회 아니잖아요. 제가 한다면 얼마나 하겠어요. 언젠가는 다 놓고 떠나야 하는데 주님의 교회인데, 주님이 알아서 하세요. 저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편히 안식하겠습니다. 주님.”
이런 짤막한 기도를 드렸는데 제 마음에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자유가 밀려왔습니다. 그 다음부터 안식년을 제가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자리에 와 있어도 안식하지 못하는 분 계십니까? 동일한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합시다. 그리고 하나님 아닌 것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되려고 하지 맙시다.
2. 관상과 영적 지도자
제가 관상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면서 제게 무척 도움이 되었던 책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장로교 목사님인데 유진 피터슨 목사입니다. 이분의 책이 우리말로 더러 번역되고 있습니다. 저는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분들은 꼭 이분의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분이 썼던 책 중에 저에게 굉장히 도전을 주었던 책이 있는데, 번역한 책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목회 영성의 흐름 그리고 주일과 주일 사이에(The contemplative Pastor)」 좋은씨앗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원제목은 「관상적 목사」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관상이란 단어가 서툴기 때문에 번역하신 분이 아예 제목을 다르게 번역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이 책의 두 번째 장에서 저는 「안식」에서 얻은 충격 이상의 충격을 또 받았습니다. 이 안식년에 제 인생이 상당히 바뀌었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가 바쁘다는 것이 뭘 의미하느냐? 목사가 바쁘다는 것은 결코 경건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경박함의 표지다. 바쁘다는 것은 경건이 아니라 경박함이다.”
꼭 저한테 하는 소리 같았습니다.
“목사가 바쁘다는 것을 헌신으로 착각할 수 있다. 열심히 하나님 일에 헌신해서 나는 오늘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렇게 뛰어다니고 있다. 오늘도 아침부터 계속 뛰어다녔다. 그런데 이것이 헌신의 징후가 아니라 망신의 징후다. 헌신이 아니라 망신이다.”
이 부분에서 제가 굉장히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이런 질문을 제기합니다.
(1) 우리가 왜 바빠지는가?
“목사들이 바빠지고 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중요한 존재로 비추어지기를 원한다.”
‘내 스케줄이 꽉 짜여 있어요. 정신없이 바빠요. 내 스케줄만 봐도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이런 생각들이 우리 속에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나 스케줄이 꽉 짜여 있다는 사실이 결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존재인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유진 피터슨은 다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둘째,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부지런하다면 우선 순위에 의해서 인생을 살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과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일보다 영적 지도자들에게 더 소중하고 더 중요한 일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다시 유진 피터슨은 질문을 바꿉니다.
(2) 우리가 바쁘지 않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첫째, “우리는 기도하는 목사가 될 수 있다.”
바쁜 시간을 조정할 수가 있다면 주 앞에 엎드려 정말 기도하는 목사가 될 수 있다.
제가 어제 저녁에 한국에서 제일 큰 신학교에 가서 신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정기적으로 매일 아침 QT 하고 하나님 만나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
1/10도 못 들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적 신학교의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날마다 QT 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1/10도 안 되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해 놓고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맞는가? 이게 진짜인가? 도대체 뭘 위해 신학을 한단 말인가? 신학교 나와서 어쩌자는 말인가?’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없이 바쁘다면 우린 정말 바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가지고 주님 앞에 엎드려 정말 기도하는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목사가 될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지 못한다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먼저 배부름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 말씀을 공급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셋째,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를 청취하는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세 번째 대목에서 특별히 좀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도 한창 바쁘게 돌아다닐 때 교인들이 와서 상담을 청하면 상담하는 게 귀찮았습니다. 얘기를 좀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을까? 얼마나 사람들의 상처를 공감해주는 사람일까?’
저는 사실 목사님들 앞에서 강의를 할 때 주로 설교에 대해 강의합니다. 그런데 한때 하나님 앞에 이런 자백을 한 적 있습니다.
“하나님, 설교가 제 우상이 안 되게 도와주십시오.”
저는 설교 준비하는 것을 아주 즐거워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깁니다. 교인들이 심방 와 달라고 하면 싫었습니다. 설교 준비 시간 뺏기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와서 심방해 달라, 얘기 들어 달라 하면 싫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독서를 하다 이런 대목에서 찔림을 받았습니다. ‘심방하는 시간이나 상담하는 시간이 설교 준비와 상관없는 시간이 아니다. 설교 준비의 한 부분이다. 설교가 뭐냐? 설교가 상처 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던져주어야 할 사건이라면 먼저 그들의 고통 이야기, 아파하는 이야기, 정말 가슴 터지고 복장 터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그런데 제 자신이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아내 얘기도 못 들어주었습니다. 어느 날 제 아내가 자신이 병들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뭐가 부족해. 왜 병들어?”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뿐 아니라 성도들의 이야기도 들어주지 못하는 나는 뭐하는 목사인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라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하지 않습니까? 목자 없이 고생하고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저들을 민망히 여기시더라”고 하였습니다. 그 “민망히 여기다”라는 말이 영어 성경을 보니까 본래는 ‘compassion, 고통을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을 동일하게 느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그들의 외로움을 내 외로움으로 느꼈단 말입니다. 목사인 내 마음에 그런 여백이 있습니까.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껴줄 수 있는 아픔이, 고통이, 외로움이 내 마음속에 정말 있느냐는 말입니다. 저에게 얼마나 커다란 찔림이 왔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제가 이 안식년 끝나면 어떻게 목회하지요? 무슨 목회를 하지요?” 주님이 저에게 주신 대답이 관상목회였습니다. 관상목회란 단어는 한국에서 생소한 단어이지만 이미 벌써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이고 있는 단어입니다.
3. 샬롬을 추구하는 관상목회의 길
관상목회의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샬롬입니다. 저는 모든 목회사역의 중요한 초점이 있다면 샬롬이라고 생각합니다. 샬롬 사역.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만날 때마다 이 인사를 주고받지 않습니까? “샬롬” 하고 인사를 합니다. “샬롬”하고 인사하십시오. 매우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시는군요. 그래서 여러분과 제게 관상이 필요합니다. 관상은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그 마음속에 있는 고통과 아픔을 느껴 보면서, ‘이분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같이 공감해 주면서, 마음으로 같이 느껴 주면서, 진심으로 “샬롬”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의 중요한 목표를 비전으로 설정한다면 그것은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샬롬 목회를 한다, 샬롬을 추구하는 목회를 한다, ‘샬롬=평화’의 메시지를 성경적으로 요약한다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큰 제목을 보면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peace with God, 하나님과 평화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peace of God.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peace with others 이웃과의 평화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하는 목적이 이 세 가지에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평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평화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화목의 제물로, 평화의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라고 믿으십니까?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평화를 누리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신득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아’ 그 결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하나님과 나 사이가 평화로운 관계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는 것 아닙니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런데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목회,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목회가 이 첫 번째 단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저의 목회도 그랬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만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우리 목회의 과제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서 안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양보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가 중요합니다.
(2) 하나님의 평화
이제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평화)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믿으십니까? 여기 ‘지킨다’는 단어는 본래 군대 술어라고 합니다. 든든한 병사들을 통해서 한 성을 평화롭게 지키는 것처럼 주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의 평화로 지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우선 여러분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요? 주님이 정말 나를 지켜주셔서 내 마음이 정말 평안함을 느끼십니까? 우리 안에 이 평화를 누리고 내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이웃에게 이 생명을 전달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한 성경학자는 이 빌립보서 4장 6~7절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평화가 그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상태를 가리켜서 아주 잔잔한 호수에 비교했습니다. 잔잔한 호수. 여러분이 본 호수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잔잔했던 호수를 여러분의 상상 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아주 잔잔하고 아름다운 호수, 그런 호수를 보면 투명합니다. 호수 속이 다 들여다보입니다. 또 한 성경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주해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평화가 지켜주는 마음, 투명하고 맑은 호수와 같은 마음, 속까지 다 들여다보이는 마음은 숨길 것도 없고 감출 것도 없이 깨끗하고 투명하고 맑습니다. 그리고 속이 다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아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사고와 건강한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했고 또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단계가 경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분명한 약속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실제가 되지 못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관상기도입니다.
관상기도의 적용
‘관상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냐?’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관상기도의 네 단계를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12세기의 귀고(Guigo)라는 사람으로 일종의 평신도 수도사였습니다. 이분이 기도의 사다리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기도의 네 가지 단계입니다.
① Lectio Divina(렉시오 디비나)
렉시오라는 말은 Reading이란 말입니다. 읽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렉시오 디비나는 신적인 독서 혹은 거룩한 독서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먼저 성경부터 읽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경건 서적도 읽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독서는 우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 성경을 읽고 출발하라.’ 여러분, 얼마나 성경적입니까? 성경적이기 때문에 관상기도에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Meditatio(메디타시오)
영어로 meditation, 묵상하기입니다. 읽은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잘 씹어가면서 묵상하라는 말입니다.
③ Oratio(오라시오)
Oral prayer, 입으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묵상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1, 2, 3단계까지 QT와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관상기도를 연구하고 추적하다 발견한 사실은 ‘아! QT가 관상기도에서 나왔구나’라는 것입니다. 전, 틀림없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QT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조금씩 실천한 사람들을 통해 개신교 안에서 다시 이렇게 소개가 되었는데 뿌리를 추적해 보면 관상기도입니다. 하나도 다른 게 없습니다. 세 번째 단계까지는 성경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QT가 잘라먹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 단계입니다.
④ Contemplatio(컨템플라시오)
이것을 ‘관상하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관상하기란 단어가 어려우면 ‘침묵으로 기도하기’라고 하면 됩니다. 성경 읽고,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붙들고 한참 기도하고, 조용히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침묵 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더 이상 무엇을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만 묵상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 묵상하고 하나님만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나를 사랑해 주시는지, 그분의 품에 안겨서,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침묵으로 들어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정말 침묵 속으로 들어가서 침묵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면 반드시 두 가지가 경험된다는 것이 모든 수도사들의 공통된 증언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첫째로 하나님의 임재가 생생하게 경험되고 둘째로 하나님의 평화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QT가 이 부분만 보완하면 됩니다.
한 관상수련가는 이 네 가지 단계를 가리켜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처음 단계는 인사하기, 자기소개 하기! 렉시오 디비나는 서로 소개하는 단계입니다. 서로 소개하고 인사하는 단계입니다. 성경 처음 읽을 때 예수님하고 인사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친근해지기! 인사가 끝나면 좀더 친해져야 합니다. 질문도 하면서 친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에 대해서 질문을 시작합니다. 묵상을 통해 친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우정 쌓기! 우정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수련가는 기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하나님과 깊은 우정을 쌓아가는 단계입니다. 기도하면서 우정을 쌓는 것이죠. 그러나 네 번째 단계에 오면 우정 쌓기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게 됩니다! 우정의 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정말 깊은 관상 속에 들어가서, 깊은 침묵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을 때의 형태를 한 수련가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주 평생을 의좋게 살아온 노부부가 인생의 말년에 어느 날 해가 너울너울 져가는 황혼녘에 의자에 앉아 노을을 쳐다보고 있다가 불현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봐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알 것 같아요.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모든 것을 알 것 같아요. 눈 한 번 쳐다보면서 서로 떨어져 앉아 있지만 마음이 하나가 돼요. 빙그레 웃어요.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 되는 거예요” 이게 이해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관상 수련가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가 내면의 침묵을 배울 수 있는 만큼, 그만큼 우리의 내적 평화는 견고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우리가 구하고 기도하는 것들을 다 놓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은 세 번째 단계에서 하고 네 번째 단계에서는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상수련의 극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도 하나님 이외에 무엇을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외해 놓고 하나님의 선물에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고 있으면 하나님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내 모든 것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랬을 때 그 하나님 한 분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채워지고, 하나님과 연합한 영적으로 연합한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을 느낍니다. 저는 이것이 관상기도가 줄 수 있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3) 이웃과의 평화
우리가 정말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을 때 그 다음에는 이웃과 평화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을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샬롬 목회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과 평화하고, 평화의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들과 평화한 그 삶 속에 들어가려면 우선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관상적 개방(contemplative opening)입니다. 관상적으로 개방해야 하고 자기를 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관상적 행동(contem-plative life and action)을 시작해야 합니다. 관상적 개방과 관상적 행동,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① 관상적 개방
내가 정말 이웃과 평화한 인생을 살고 그 평화 속에 이웃들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 그런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를 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열어야 합니다. 개방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열어야 합니다.
제가 셀 교회 운동을 하면서 누린 가장 커다란 복이 있습니다. 바로 지난 주간에 셀 컨퍼런스를 했는데, 저희 셀을 다 열었습니다. 1,300개 정도의 셀이 있는데 그 중에 한 400개를 열어서 이번에 탐방 오신 분들이 탐방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분들이 제일 도전을 받고 충격을 받은 부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중에 소감과 평가한 것들을 다 받았는데 써낸 분들의 80~90%가 이렇게 썼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지구촌교회에서 나눌 수가 있습니까?”
그런 것까지! 제가 셀 운동과 관상목회를 강조하면서 나눔이란 것을 강조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공부를 지적으로 나누는 것, 거기에 많이 매달렸었는데 셀 목회로 전환하면서 철저한 나눔을 강조했습니다. 철저한 나눔. 그랬더니 별걸 다 나누는 것입니다. 보통 상담실 가서 나누는 그런 이야기들까지 교인들이 그 셀 모임, 다락방 모임, 구역 모임에서 나눕니다. 거기서 치료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마음 열기 훈련을 시킬 때 자주 사용하는 것이 조아리의 창(the Johari Window)이란 것입니다. 이분이 심리학자인데 우리의 마음을 열기 위해 네 가지 형태로 분석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네 가지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나, 자아를 네 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데 표면적인 자아, 숨겨진 자아, 맹목적인 자아, 무의식적인 자아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말하지만 내 속에는 네 가지의 이러한 부분들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 드러난 자아
겉으로 드러난 자아, 표면적 자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나의 모습은 나도 알고 있는 내 모습이고 타인도 보고 있는 내 모습입니다. 다 드러나 있습니다. 노출된 모습입니다. 그럼 빨리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이웃의 도움을 받으면서 드러나 있는 약점이나 노출된 내 모든 문제들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그것을 공동체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 숨겨진 자아
자기가 숨기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내가 숨기고 있는 내 모습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절대로 못 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숨기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그 은밀한 모습, 내가 숨기고 있는 내 모습, 나 혼자 즐기고 있는 부덕한 내 모습. 다른 사람은 못 보기 때문에 치료를 받으려면 내가 열어야 합니다. 스스로 열어야 합니다. 용감하게 열어야 합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서 늘 이것을 강조합니다. ‘여는 만큼 치료되는 것이다.’
여러분, 환자가 병원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선생님, 제가 여기가 아파요.” 그리고 옷을 벗습니다. 마음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것이 치료의 시작입니다. 그걸 못하면 치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 맹목적인 자아
이것은 다른 사람은 보는데 내가 보지 못하는 내 모습입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지?’ 다른 사람은 다 보는데 보지 못하는 맹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주는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충고와 비판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못하면 치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충고를 받아들이고 비판을 수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열등감이 많을수록 타인의 충고를 수용하지 못합니다.
㉣ 무의식적인 자아
이것은 나도 못 보는 내 모습, 타인도 못 보는 내 모습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만 지적해주시는 나의 모습입니다. 기도하다가, 말씀 읽다가 문득문득 성령께서 그런 내 모습을 드러내시고 지적하실 때, 성령님 앞에 엎드리면 됩니다. 그분 앞에 엎드리면 됩니다. “주님, 맞습니다. 그게 나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평화를 만드는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열어야 합니다.
② 관상적 행동
㉠ 숨의 여유(숨 기도)
그런데 관상적 행동을 어떻게 시작하느냐, 저는 이것부터 훈련을 시킵니다.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좀 가지세요.” 다른 건 몰라도 누가 이상한 소릴 했습니다. 열 받았습니다. 그때 같이 받아치기 전에 그냥 숨 한번 쉬세요. 길게 심호흡 한번 하세요. 관상기도를 했던 신앙의 선배들은 이것을 ‘숨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뭐라 하면 숨 한번 쉬고 그 동안에 짤막한 기도 한번 해보십시오. 자, 누가 나를 긁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나를 긁어 놨습니다. 같이 받아치기 전에 숨 한번 쉬면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주님 어떡하지요?” 이 템포만 있어도 독이 빠집니다. 그런데 그 숨 쉴 수 있는 여유도 갖지 못합니다. 그냥 듣자마자 받아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회 잘 하다가 한 순간 굉장한 어려움을 만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숨 쉴 수 있는 여유만 가지십시오.
㉡ 느리게 사는 라이프 스타일(과정 중심의 삶)
그냥 한 템포만 늦춥시다. 한 걸음만 늦추십시오. 한 걸음만 늦춰 사는 인생. “조금 늦게 가시면 안 돼요? 지금 꼭 결정하셔야 합니까? 그렇게 생사를 좌우할 문제입니까?” 저는 합의가 안 되면 그럽니다.
“주님께서 아직 우리 가운데 이 일을 하실 때가 된 것 같지 않습니다. 1년 기도해 봅시다. 한 달 더 기도해 봅시다.”
저도 한국에서 개척한 지 11년 지났는데 교회를 벌써 네 번, 다섯 번 옮겼습니다. 그때그때마다 많은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제가 우겨본 적이 없습니다. 의논이 합의가 안 되면 기도해보자, 주님이 주시는 타이밍까지 기다려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6개월, 1년 지나서 훨씬 더 나은 방법으로 훨씬 좋은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조금만 템포를 늦추면 됩니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인생을 살자, 결과만 추구하지 말자!’ 오늘 우리 시대는 결과를 내라고 소리칩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저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냥 5년 후, 10년 후 생각하다 그 과정의 시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관상수련가 가운데 클레르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090년부터 1150년까지 산, 12세기 위대한 영적 스승인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 버나드라고 합니다. 이분이 많은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분이 죽었을 때 교회는 이분을 박사라 칭했습니다. ‘Doctor of the church’라는 명칭을 수여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젊은 수도사 후보생(우리로 말하면 신학생)이 산꼭대기에 있는 수도원까지 헐레벌떡 올라와서 베르나르드 원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원장님, 저를 수도사로 받아주십시오. 제가 수도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숨을 헐떡이는 청년을 보면서 베르나르드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 자네, 이 산에 올라오다가 그 도중에 무엇을 봤나?”
“뭘 보다니요? 저는 원장님 만나려고, 수도사 되려고 부지런히 올라오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베르나르드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자네는 말이야. 이 산을 올라오는 중에 산을 타고 계곡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시냇물, 그리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부는 바람, 그리고 지저귀는 아름다운 새들의 찬양 소리, 그리고 하나님이 걸어 놓으신 아름다운 구름, 이 모든 진리를 놓치고 여기까지 올라왔네. 여기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진리를 찾는단 말인가? 그 많은 진리를 놓쳐 버리고 무슨 진리를 찾는단 말이지.”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 얘기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우성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는 중에 여기 내가 오늘 하루라는 삶의 장에, 사역의 장에 주께서 걸어 놓으신 아름다운 복들과 은혜들을 다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5년 후까지 산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이 즐거워야지요. 오늘이 보람 있어야지요. 오늘이 행복해야지요. 이 순간이 정말 하나님 앞에 행복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결과주의에 치우친 인생 속에서 이런 소중한 복들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가요? 관상목회는 바로 이런 것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여유있게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가 행복하면 교인들이 다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목사님 얼굴을 보면 그 목사님을 밤낮 쳐다보는 교인들이 참 안돼 보입니다. 저분 얼굴 쳐다보고 1년 52주를 순교자적 심정으로 어떻게 견딜까? 관상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웃에 대한 관조의 여유
저는 단순히 성공이라는 개념의 목회에 상당히 지쳐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성공을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목회이고 행복한 목회이고, 치료하는 목회이고, 평화를 창조하는 목회입니다.
저는 관상기도를 하면서 사람들을 볼 때 이런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냥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물론 겉으로 나타나는 것도 잘 봐야 하지만 이렇게 봅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으니까 ‘아, 성전인 몸이다’ 하고 하나님이 지어 주신 작품으로서의 몸인 관상을 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깊은 곳에 있는 속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그러나 그 깨어진 형상을 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처 받고 깨어지고 아파하고 외로워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를 외롭게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있을까?’ 깊이 사람을 바라보는 훈련을 합니다. 그러면 붙들어 주고 싶습니다. 축복하고 싶고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나가는 말
제가 하고 있는 관상 세미나에서는 끝날 때 항상 이렇게 끝냅니다. 둘씩 짝을 짓고 손을 댑니다. 한 번 해보십시오. 그리고 잠시 침묵을 하세요. 아무 소리 하지 마세요. 겉으로 보이는 겉 사람을 보지 말고 속사람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 보세요. 아픔, 슬픔, 고통을 쳐다보세요. 그의 존재를 느껴 보세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침묵으로 기도해 보세요. 이분에게 하나님이 은혜 주시라고, 이분을 건강하게 해달라고, 이분을 하나님이 붙들어 달라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꼭 쳐다보세요. 지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마음속으로 축복하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충분히 하셨으면 정성을 다해서 “샬롬” 하고 인사하세요. 축복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