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Column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 네트비야교회 예배

샬렘하우스주방장 2013. 9. 24. 18:17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 네트비야교회 예배2012.01.08 17:35


유대인 대표적 크리스천 교회

열심히 성경읽는 회당식 예배

설교 들으며 쉴새없이 “아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류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은혜의 역사였다. 유대교 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말한 바와 같다. “유대인은 인류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막대기다”. 막대기는 언제나 잘 보이는 곳에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다.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오랜 세월 거기 있었는가? 아마도 하나님일 것이다. 그들의 삶과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한 예가 예배이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약 1만5000명의 크리스천이 있고 그들이 섬기는 교회도 120여개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 곧 ‘메시아닉 주(Messianic Jew)’라고 부르지만 메시아닉 주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신앙고백 외에 각기 다른 전통과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예배의 형태도 그렇다. 온건한 장로교식 예배로부터 과격한 열린 예배, 그리고 전통적인 회당식 예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배 형태가 있다.

필자는 작년 8월, 그 중 하나인 요셉 슐람 목사가 시무하는 네트비야교회(케힐랏 네트비야:네티비야 공동체)를 방문했다. 요셉 슐람 목사는 정통파 유대인으로 태어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전도자가 되었다. 그가 세운 예루살렘 네트비야 교회는 대표적인 유대인 크리스천 교회 중의 하나이다.

필자가 이 교회에 관심을 가진 것은 유대인의 전통적 예배를 계승한 회당식 예배 때문이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예배는 2시간이나 계속되었다. 히브리어로 진행된 데다가 유대교 회당예배와 너무 비슷해 처음에는 잘 적응이 안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예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예배는 전체적으로 유대인의 전형적인 찬양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찬양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는 찬양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기도문(시두림)은 말씀에 곡을 붙인 것으로, 악보는 없으나 전통적인 운율에 맞추어서 부른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생소하지만 마음을 열고 참여하면 많은 은혜를 받는다. 랍비 이삭 레비가 ‘회당: 그 역사와 기능’에서 한 말과 같다. “유대인들은 항상 노래 속에서 기도한다”.

찬양은 예배시간 내내 이어졌다. 찬양과 함께 긴 성경읽기가 시작되었다. 회당식 예배를 드리는 네트비야에서는 유대인 회당의 전통에 따라서 먼저 모세오경 중 한 부분을 읽는다. 유대인들은 오경을 53개의 파르시욧(단락)으로 나누어서 매주 회당에서 하나씩 읽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관련된 선지서의 말씀을 읽고, 유대인 기독교공동체의 경우는 이 이외에 관련된 신약의 메시지도 같이 읽는다.

필자가 참석했을 때에도 오경에서 하나(신 30∼31장), 예언서에서 하나(렘 1장), 그리고 신약에서 하나(마 4장)를 읽었다. 성경읽기는 유대인 전통예배의 중심에 속한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에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셨다. 전통적 유대교 예배는 설교보다는 성경읽기가 더 강조된다.

탈무드에도 성경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말씀을 백 번 읽는 것과 백한 번 읽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말씀을 공부하되 반복해서 읽지 않으면 씨 뿌리고 거두지 않는 농부와 같다.” 그리고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예배는 설교로 이어졌다(눅 4:20∼21). 설교는 예배의 하이라이트였다. 모든 예배자가 한 시간 이상 설교를 들었지만 누구 하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멘’은 예배의 중요한 응답 수단이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동안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아멘을 반복했다. 한 유대인 랍비는 아멘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힘을 다해 아멘 하고 말하면 천국문이 그에게 열릴 것이다.”

예배 전체를 이끄는 사람이 랍비가 아니라는 점도 특이했다. ‘하잔’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성인 남자로 예배 앞자리에서 예배를 이끌지만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기도는 그가 시작했고 그가 마무리했다. 예배 도중 어린이를 위한 축복기도가 있었고 간단한 광고도 있었다. 복장은 대부분 머리에는 키파를 쓰고, 예배시에 옷 위에 탈리트(기도 숄)를 걸쳐서 겉으로 보기에는 유대교 예배인지 크리스천 예배인지 모를 정도였으나 예배 드리는 성도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한국의 전통 장로교회의 신앙고백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유대인의 전통대로 몸을 흔들거나 손을 들고 기도하기도 하고 손뼉을 치며 찬양하기도 했다. 오늘날 유대인 크리스천 예배는 오랜 세월 저들 조상들이 해왔던 회당예배를 이어가고 있다.

회당식 예배를 통해서 배우는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몇 권의 안내서가 있다. Hayim Halevy Donin의 ‘To Pray as a Jew’와 윌리엄 심프슨의 ‘유대인의 예배와 기도’ 등이다.

유대인 예배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하나님 경외와 임재의 예배이다. 예배의 인간적인 요소는 극히 제한되고 하나님께만 집중되는 예배이다. 예배는 과거 성전구조를 재현한다. 과거 성전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들의 뜰, 여인들의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을 거쳐 하나님의 보좌인 지성소로 나아간다. 유대인 예배는 이것을 예배에서 형상화한다.

이방인의 뜰은 하나님 없는 불신 세상을 의미한다. 누구나 예배자는 여기서 출발한다. 그 이방인의 뜰을 헐고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신 분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이방인의 뜰을 열고 들어가면 여인들의 뜰이 있다. 여인들의 뜰은 여인들만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여인들도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뜰은 ‘행동하는 세상(world of action)’을 의미한다. 아마 여기서부터 찬양이 시작되고 예배가 시작될 것이다. 이때 고백하는 주제는 하나님 앞에 선 연약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 나는 흙입니다. 나는 연약한 피조물입니다”(창 2:7).

이어 예배자는 이스라엘 뜰로 들어간다. 이 뜰을 ‘형성의 세계(world of formation)’라고 부른다. 이 때 예배자는 흙으로 지음 받은 자신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지음 받기 원하는 간절한 소원과 간구를 드린다. 말씀과 찬양과 기도는 이것을 함께 고백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뜰을 거쳐 제사장의 뜰로 가면 왕이신 하나님 앞에 바짝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을 ‘창조의 세계(world of creation)’라고 부른다. 성소에서 드리는 기도를 ‘아미다 기도’라 한다. ‘아미다’는 ‘일어섬(stand)’이라는 뜻으로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소의 세계는 ‘아찔루트의 세계’이다. ‘아찔루트’란 ‘방출하다, 빛을 뿜다’라는 뜻이다. 성소에 들어가면 메노라, 떡상, 분향단에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아가서 1장 4절의 말씀이 그 상황을 표현한다.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배는 왕이신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신부로 서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유대인 크리스천 예배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인간적이며 자기도취적인 예배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네티비야 교회를 나오면서 필자는 그것을 묻고 또 물었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