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Book
[예수, 선을 말하다]-케네스 렁 지음 |진현종 옮김 |지식의숲|
샬렘하우스주방장
2012. 12. 6. 23:54

책소개
선(禪)을 통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살펴보는 책. 저자는 수년 동안의 선 수행과 여러 기독교 종파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와 선불교의 소통과 열린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복음서에 실려 있는 예수의 언급을 선과의 대비를 통해 그 공통성과 유사성을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책은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두 종교를 바라보면 다양한 영적 전통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해석의 다양성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선의 특징을 10가지 태도로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기본 개념들을 살펴보면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기독교관과 개념을 새롭게 정리하였다.
저자 케네스 렁(Kenneth S. Leong)은 홍콩 출신으로 미국에 거주하면서 뉴욕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성공회 신자이자 뛰어난 선사(禪師), 저술가, 예술가이기도 한 저자는 기독교와 불교, 도교에 탄탄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동서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명상을 가르치기도 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종교 간의 대화에 몰두했으며 여러 교회, 사원, 대학 그리고 영성을 추구하는 다양한 조직 및 종교 단체에서 강연을 해 왔다. 그는 현대 사회의 영성을 주제로 폭넓은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 책은 저자의 다년간의 선 수행과 여러 기독교 종파와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다. 저서로 『예수, 선사(Jesus, der Zenlehrer)』 등이 있다.
역자 진현종은 성균관 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저술가 및 영어, 중국어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불교를 중심으로 한 동양 사상 관련 서적을 주로 번역하고 있으며, 각종 매체에 논쟁적인 글과 서평을 싣고 있다. 『여기, 공자가 간다』, 『틱낫한 스님과의 소박한 만남』,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등의 저서가 있고, 역서로는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틱낫한, 내 스승의 옷자락』, 『달라이 라마, 삶을 이야기하다』, 『마음도둑―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밖에 없다』 등이 있다.
시작하는 말
1장 선으로 읽은 복음서
2장 선이란 무엇인가Ⅰ
3장 선이란 무엇인가Ⅱ
4장 불가사의한 천국
5장 선, 바리보기의 예술
6장 거꾸로 된 세상
7장 별스럽지 않은 지옥
8장 믿음
9장 내 멍에는 편하다
10장 사람을 더럽히는 것
11장 악에 대항하지 말라
12장 사랑
13장 내가 곧 길이다
끝맺는 말
주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기독교와 선불교의 열린 대화‘차이는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라고 규정짓는 근본주의적 시각 때문에 각 종교는 서로 배타적이고 질시와 반목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는 종교 간의 대화의 역사도 짧고 잠재적인 갈등도 적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되고 있고,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종교 간의 대화를 어떻게 지혜롭게 연결시킬 것이냐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이웃 종교를 배려하고,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신간은 성공회 신자이자 선사(禪師)이며, 기독교와 불교, 도교에 탄탄한 지식과 식견...
기독교와 선불교의 열린 대화
‘차이는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라고 규정짓는 근본주의적 시각 때문에 각 종교는 서로 배타적이고 질시와 반목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는 종교 간의 대화의 역사도 짧고 잠재적인 갈등도 적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되고 있고,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종교 간의 대화를 어떻게 지혜롭게 연결시킬 것이냐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이웃 종교를 배려하고,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신간은 성공회 신자이자 선사(禪師)이며, 기독교와 불교, 도교에 탄탄한 지식과 식견을 가진 저자가 수년 동안의 선 수행과 여러 기독교 종파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와 선불교의 소통(疏通)과 열린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선의 특징을 현전성(現前性), 평범함, 열정, 통찰력, 무위, 부드러움, 자유, 단순함, 역설, 우뇌적인 태도라는 10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예수의 삶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 천국, 사랑, 믿음 등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기본 개념들을 살펴보면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기독교관과 개념을 재고하도록 하고, 기독교와 선의 유사성과 합일점을 찾고 있다.
이 책은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두 종교를 바라보면 다양한 영적 전통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해석의 다양성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10가지 선의 특징
저자는 선을 종교 또는 철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신문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1장부터 3장에서는 선을 주로 예술과 비교하면서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10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1)현전성(現前性)은 자기 내부와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완전히 알아차리는 능력(깨달음)을 말한다. ‘붓다’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세상의 빛’이라고 불린다. (2)평범함, 선은 비범하고 기적적인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평범한 방법, 일상적인 것을 통해 영적인 깨달음을 가르친다. 선은 평범함이 주는 경이로움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해 준다.
(3)열정, 열정을 지니면 독창성과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고 단순한 일상 속에서도 삶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어떤 개념, 견해, 가치 또는 일을 처리하는 특정한 방식에 집착(사로잡힘)하거나 강박 관념을 가지지 않을 때 비로소 열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4)통찰력은 피상적인 것을 보는 데 그치는 ‘그냥 봄(looking)’과 달리,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봄(seeing)’을 말한다. 깊은 영적 통찰력 없이는 참된 영성도 있을 수 없다. (5)무위(無爲)는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의 의미, 즉 힘을 낭비하지 않고 자연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6)부드러움은 억지나 폭력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삶을 아름답게 하고 일을 신성하게 하는 열쇠이다. 이는 물에 비유할 수 있는데, 부드러움은 물과 같이 어떤 그릇에 쏟아 붓는다 하더라도 금방 그 그릇의 모습을 띠게 된다. 부드러움은 실재에 순응하는 것이며 순응성이야말로 최상의 힘이다. (7)자유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절대적인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로 자유는 그것에 연관된 속박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따름이며, 자유와 속박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다. (8)단순함, 한자로 ‘선(禪)’은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내보이다’(示)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간단하다’(單)는 의미이다. 선은 단순한 삶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를 의미한다.
(9)역설(逆說)은 논리 또는 상식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된 말을 가리킨다. 선의 역설은 실재의 본성에 관한 중요한 사항을 알려 주며, 역설을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과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관건이다. (10)우뇌적인 태도, 받아들이고 상상하고 균형을 잡고 적응하는 것이 우뇌의 특징이다. 우뇌는 우리가 느끼고 인지하고 듣고 감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선은 언어를 통하지 않는 통합적인 활동을 강조하고 우뇌적인 태도를 가짐으로써 삶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한다.
선을 통해 본 예수의 삶과 가르침
4장부터 13장까지는 앞서 말한 선의 10가지 특징을 근거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기독교관과 개념을 재고하고 있다.
4장 불가사의한 천국에서는 천국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천국은 기쁨의 상태를 일컫는 것인데, 비생산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기쁨은 곧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천국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無思) 지대에 있고, 무사 지대에 산다는 것은 시간이 없는 지대에 산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천국은 영원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천국을 미래라고 여기는 것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사는 버릇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천국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다.
5장 선, 바라보기의 예술에서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지각하는 모습, 소리, 맛, 냄새 가운데 ‘물 자체(thing-in-itself)’의 본질적인 속성에 해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대상은 지각하는 주체에 좌우된다. 그렇다면 과연 ‘실재’란 무엇인가 묻고 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실재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그것을 지각하는 방법의 선택에 달려 있다. 행복은 정신적인 연금술, 즉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전환에 달려 있다. 새로운 견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익히면 파란만장한 세상, 즉 결점, 비탄, 고뇌, 더러움으로 얼룩진 이 세상이 곧 열반의 세계가 된다.
6장 거꾸로 된 세상에서는 선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중심 주제인 부활을 살피고 있다. 예수는 죽음을 축복으로, 그리고 현실로 받아들여 해탈과 평화를 얻게 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집착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켰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적이다. 이러한 역(逆)의 법칙이 삶의 불안을 해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사람들은 불안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며, 진정으로 살고자 한다면 목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7장 별스럽지 않은 지옥에서는 지옥이 특별한 곳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옥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 생각에서 비롯된 것, 그리고 지옥은 범죄의 결과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통상적인 상황이다. 그리고 지옥은 형벌이 아니며, 하늘나라와 완전히 떨어진 곳도 아니고 하늘나라의 일부이며, 또한 지옥은 영원히 고통 받는 곳도 아니다.
8장 믿음에서는 아름답게 꾸며진 탐욕 또는 두려움의 표현인 믿음을 경계하라고 한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아를 굴복시키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믿음은 굴복의 문제이지 요구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은 이기적인 추구와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인 복종과 관련된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굴복, 즉 믿음에는 상호 신뢰와 친밀함이라는 요소가 들어 있기도 하다. 선에서 믿음에 상응하는 것은 부드러움이고, 부드러움은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9장 내 멍에는 편하다에서는 영성에 대해 살피고 있다. 영성은 ‘신성하게 분리’된 것보다는 일상생활과, 특별한 것보다는 평범한 것과 더 연관이 많다. 선은 일상적인 영성이며, 도는 평범한 것 속에 있다. 또한 영성은 화합과 관련이 있는데, 화합은 먼저 자기 자신, 두 번째로는 타인, 세 번째로는 세상,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과 이루어져야 한다. 즉 그것은 평범한 것과 익숙한 것으로 시작된다. 종교적인 삶을 예배, 의식, 교리같이 지나치게 많은 ‘특수한’ 것들과 결부시킨다면 일상생활 속에 있는 영성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10장 사람을 더럽히는 것에서는 경청에 대해 언급한다. 참된 경청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에 완전히 몰두할 때 일어나는데, 그때 우리는 두려움과 탐욕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음은 어떤 일을 하거나 관심을 끌려는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거룩함을 체험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11장 악에 대항하지 말라에서는 원수, 중독성 약물, 질병 그리고 악마 같은 흔히 말하는 악이라는 문제, 그리고 인생의 어두운 측면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대할 때 싸우거나 억압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회피와 탐닉 역시 도피의 발로이다. 해결책은 싸우지 않는 것이다. 탐욕, 육욕, 증오 그리고 두려움마저도 스승이 될 수 있고,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내면의 진리로 인도해 준다. 두려워하는 것에 마음을 열고, 깊고 진솔한 느낌으로 그것을 접하는 것이 관건이다.
12장 사랑에서는, 진정한 사랑은 무차별적인 것이며 인간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완전한 신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완전함을 사랑하고 그것에 가까워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의 사명이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자아, 즉 허위에 불과한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선과 기독교의 사랑이 만나는 지점이다. 사랑은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인데, 그것은 자아가 사라져 버렸다는 뜻이다.
13장 내가 곧 길이다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독선적인 종교관을 비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내가 곧 길이다.”라는 예수의 말은 오만한 표현이 아니고,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기독교에만 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자신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라는 요청이다.
신간은 예수를 불교의 선종(禪宗)에 예속시키거나 혹은 선종을 예수에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저자가 찾아낸 두 종교의 공통성을 근거로 어설픈 종교 통합주의를 주창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도 타종교의 가르침을 십분 이해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근거로 자기 종교 전통의 잃어버린 혹은 숨겨진 부분에 대해 새롭고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