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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무엇이 중한가?… 영성 대가들에 배운다

샬렘하우스주방장 2016. 9. 9. 12:18

삶에 무엇이 중한가?… 영성 대가들에 배운다

영성의 깊은 샘/ 제럴드 싯처 지음 /신현기 옮김/IVP

입력 2016-09-07 20:48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중세의 평신도들에게 ‘일상의 영성’을 강조했다. 노동과 기도가 이어지는 하루 일과에서, 햇빛과 바람의 일렁거림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다. 국민일보DB
삶에 무엇이 중한가?… 영성 대가들에 배운다 기사의 사진

초대교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내에서 일어난 영성운동의 역사를 쉽게 풀어낸 책이다.

올 여름 ‘곡성’이라는 영화에서 나온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가 유행했다. 이 대사는 어느 쪽이 선한 영이고 악한 영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 주인공을 향해 던진 말이다. 깊은 신비에 빠져본 사람들은 이런 혼란을 흔히 경험한다. 수많은 관객들이 이 대사를 인상 깊게 기억한 것도 우리 시대의 영적 혼란을 드러내 보여주는 대사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흔히 현대인은 (제도화된) 종교는 믿지 않아도 개인적인 명상과 기도로 타자화된 신이 아니라 자기 안의 참된 자아를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이내 수많은 잡념과 혼란 속에 길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이다. 깊은 기도 속에서도 들려오는 음성이 천사의 노래인지 악마의 유혹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현대인의 영성이 자기의 욕망을 따라가는 자기계발이 되거나 윤리감각을 잃고 타락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영성 수련에서 제도나 전통을 고수할 필요는 없겠지만, 깊은 영성의 세계에 먼저 다다랐던 이들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수많은 잠언과 수련법에 둘러싸인 현대의 도시에서 ‘뭣이 중헌지’를 알고 싶은 진지한 기독교인이라면 꼭 읽어볼만하다.

미국 휘트워스대에서 기독교 역사와 영성을 가르쳐 온 제럴드 싯처 교수는 초대교회부터 현대 복음주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역사적 국면에서 어떤 영성이 발현돼 왔는지를 쉬운 문체로 풀어놓았다. 싯처 교수의 입장은 대체로 개신교 전통에 충실하지만 중세교회와 현대 가톨릭의 영성에도 폭넓게 관심을 쏟으며 다양한 흐름을 지루하지 않게 잘 요약해 놓았다.

흔히 영성이라고 하면 기도와 묵상이 깊어지면서 신비한 영역에 이른 정신적인 경지로 여기기 쉬운데 싯처 교수가 소개하는 영성의 실체는 지극히 물질적이고 일상적이다. 노동과 기도가 이어지는 하루의 리듬,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담긴 하나님의 축복, 한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교감이 바로 영성이다.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다. 중세 평신도의 영성을 ‘일상성’이란 키워드로 풀어낸 이 책의 8장에 잘 소개돼 있다. 유명한 ‘태양의 찬가’에서 그는 태양과 달과 별과 바람과 물과 몸의 죽음조차 형제·자매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노래했다.

“내 주여, 형제 바람을 통해, 흐리고 화창한 대기와 온갖 날씨를 통해 찬양을 받으소서.”

스치는 바람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듣는 것, 그것이 영성이다. 일상의 영성은 중세에 이르러 유럽에서 도시가 형성되면서 부각됐다. 도시인에게는 이미 최상위 계급이 된 성직자나 광야와 사막으로 떠난 수도자들의 영성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신앙이 필요했는데, 프란체스코가 그 문을 열었다. 싯처 교수는 “젊은 날의 방황에서 회심한 그는 가난한 사람과 병자와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기로 선택했다”며 “그는 모든 세속적인 추구를 피하면서도 도시 속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바쳤다”고 설명했다.

1500년 전 수도원 운동의 영성을 ‘리듬’이라고 분석한 4장도 흥미롭다. 수도원 운동은 노동과 기도라는 하루의 리듬, 일과 예배라는 한 주간의 리듬, 절기를 따르는 1년의 리듬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했다. 밤늦도록 네온사인이 꺼질 줄 모르는 현대 도시의 깨어진 리듬과 대비된다. 어쩌면 좀비 영화에 나오는 좀비들은 리듬을 잃은 일상 속에서 영성마저 메마른 채 거리를 떠도는 현대인의 표상인지도 모르겠다.

싯처 교수는 이밖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은 ‘소속감’으로, 사막 성자들의 영성은 ‘고투’로, 성례전의 영성은 ‘창’으로, 신비주의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개척 선교사들의 영성은 ‘모험’으로 풀이하며 풍부한 사례를 들어 간결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부터 청교도와 현대 복음주의 설교가들까지 영성의 역사를 풀이하고 있지만 꼭 연대기 순인 것은 아니다. 순교자들의 영성을 읽을 때는 100여년 전 한국 땅에서, 수십년 전 중국에서, 지금은 또 다른 어디에서 생명을 걸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기독교인에게 영성이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삶의 태도, 그것을 이르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