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영성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1. 기독교 복음과 영성의 세 가지 특징
제가 최근에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복음은 약한 것이구나, 복음은 착한 것이구나,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끝까지 죽음과 고난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구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오늘 제가 최근에 새롭게 발견하고 깨닫게 된 복음과 영성의 중요한 특성 세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약함의 종교다. 기독교는 착함의 종교다. 기독교는 주변성의 종교다. 기독교의 영성도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에 있다.”
이 말씀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기독교의 복음과 영성의 특징은 약함입니다
이것은 모순되고 역설적인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하고 어리석을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과 영성입니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이다”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약한 것이다,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너무 강해졌고 너무 지혜로워지지 않았을까요? 수 년 전에 한국의 지도자 임택진 목사님이 한국 교회를 진단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한국 교회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한국 교회가 그동안 지도자를 너무 크게 우상화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게바, 바울, 아볼로를 너무 우상화해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국 교회 일부는 김재준 목사를 우상화했고, 또 한 쪽에서는 한상동 목사를 우상화했고, 한 쪽에서는 박형룡 박사를 우상화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다음 순서에 제가 나가서 발표하면서 “임택진 목사님! 올바른 판단이고 옳은 지적입니다. 아마 저와 일부는 박윤선 목사를 우상화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인 존 스토트 박사는 2000년 7월 영국 케직사경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하나는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나는 헬라의 지혜로 복음을 포장하려 하지 않고, 로마의 웅변술로 각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복음 자체는 약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약한 것을 그대로 제시해야 되고, 어리석은 대로 그대로 제시해야 됩니다. 너무 지혜로우면 지혜를 바라보게 되고 너무 유창하고 웅변술이 좋으면 웅변술에 감동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약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약한데 어떻게 사람이 강하고 지혜로워질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향한 이와같은 시도를 단호히 거부하며 말하기를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베드로와 바울과 아볼로를 우상시한 나머지 십자가와 예수님은 사라졌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무슨 물건이며, 게바는 무슨 물건이냐? 아볼로가 무슨 물건이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지칭하는 명사를 남성명사 대신 중성명사를 쓴 것입니다. 그 다음에 조금 내려가보면 nothing, 없는 것과 같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 보면 시궁창에 버려지는 음식 찌꺼기 같다고 했습니다. 보통 개인 집이 아니라 우주의 찌꺼기, 쓰레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복음 자체도 약하고 어리석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약하고 어리석고 찌꺼기가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존 스토트 박사는 세계를 많이 다니는데 자기의 약함의 영성을 지닌 설교자들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바울과 같은 사람은 신학교에 지원하면 아마 틀림없이 낙제할 것입니다. “두렵습니다. 약합니다.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웅변도 못합니다. 지식도 없습니다.” 그러면 아마 낙제를 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의 전달자들은 약함과 어리석음을 지녀야 됩니다.
셋째, 복음을 받는 사람의 자격도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6~27).
초기의 한국 교회는 약하고 가난하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겸손히 땅에 엎드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약하고 힘이 없고 소망이 없는 한국 교회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부흥과 복의 손길을 펴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너무 커지고 너무 강하고 너무 지혜로워졌습니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너무 위대해졌습니다. 거의 우상화되었습니다. 이민 교회 지도자 한 분이 저와 식사를 하면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너무 높아서 쳐다보면 머리가 어지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너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였고, 사회로부터 실망과 불신을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바울처럼 약해져야 하고 어리석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약해지셨고 가난해지셨고 비천해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약할 그때에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머물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둘째, 기독교 복음과 영성의 특징은 착함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착하셨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해 왔습니다. 세 가지 모토가 기독교 복음의 중심과 기초가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말씀만 강조한 나머지 말과 지식에 치우치게 되었고,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은혜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하며 감정만 강조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착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이적을 행해도 착한 마음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최고의 착함은 사랑이요, 사랑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까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였지만 착한 사람들 도르가, 고넬료, 루디아, 디모데, 목이라도 내놓으려고 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런 사람들이 발판을 다 닦아놓은 것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모습이고 그의 영성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점은 착함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요? 착하다는 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레위인 소용없다, 제사장 소용없다, 너도 착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보수주의자들이 보수교회에서 강조를 못했을까요? 좀 착한 목사가 될 수는 없을까요? 진리로 내리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눈물이 있는 착함이 기독교의 본질이고, 복음의 본질이고, 우리가 사모하는 영성입니다. 착함과 눈물과 사랑이 없는 진리는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본래 말씀이었지만 말씀으로 그냥 있으면 안 되니까 삶이 되셨습니다. 삶이란 것은 착함입니다. 말씀만 있으면 안 되니까 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아픔과 고통과 배고픔을 짊어짐으로 우리와 동일시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그 자체가 착함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말씀도 하셨지만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사랑과 용서와 희생과 죽음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누가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 1:1~2).
예수님은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착한 행실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이 특별히 디모데를 그렇게 보고 싶어합니다. “디모데처럼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남을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진솔한 모습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와 이민 한인교회에 필요한 것은 유창한 설교보다 정통신학보다 뜨거운 체험보다 상처 입은 자를 품을 수 있는 따뜻하고 착하고 선하고 인정과 사랑을 지닌 삶의 목회자입니다.
장기려 박사가 죽었을 때 한국 교회와 사회는 작은 예수가 죽었다고 칭송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고훈 목사님은 참목자를 잃은 텅 빈 세상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들은 지식을 나타내 보여주기 전에 예수 닮은 착한 삶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에 예수님 닮은 삶을 나타내 보여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더듬어 살피면서 주일마다 설교를 했습니다. 길선주, 이기풍, 최권능, 조만식, 이승훈, 유관순, 주기철, 손양원, 장기려, 한경직, 송명희, 프랜시스, 브레이너드 등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더듬어 살피며 주일에 설교를 하면서 저는 얼마나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들은 다 주는 삶, 착한 삶을 사신 분들이었습니다.
셋째, 기독교 복음과 영성의 특징은 주변성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 중 하나는 자기 중심 또는 중앙 집중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 민족은 한반도라는 지형적 특성과 유교라는 사회 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아 개인 중심적이고 가문 중심적이고 지역 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특성은 주변 지향적이고 이방 지향적입니다.
구약의 복음은 이미 주변 지향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의 관심을 자기 본토나 아비 집에 두지 않고 “땅의 모든 족속”(창 12:3)에게 두도록 했습니다. 이사야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의 사명을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는 이스라엘 회복에 머물지 않고 “이방의 빛을 삼아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사 49:6) 하는 데 두도록 했습니다. 요나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그의 관심이 이스라엘이 아닌 앗수르의 구원에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네가 망하기를 원하는 니느웨를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
니느웨는 그 당시 ‘악의 축’이었습니다. 신약의 복음도 분명히 주변 지향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실 때 지역적으로는 갈릴리, 사마리아, 욥바, 가이사랴, 안디옥을 통해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 등 주변과 이방으로 퍼져나가게 하셨고, 사회적으로는 중심에서 소외된 버림받은 죄인들과 병자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 베드로와 바울도 주변 세계로 향해 달려간 이방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기독교의 복음 선교도 주변 지향적이었습니다. 기독교 선교는 ‘십자군의 정복’의 죄악을 저지른 때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패트릭의 아일랜드 선교, 보니페이스의 독일 선교, 프랜시스의 이방인 선교, 브레이너드의 인디언 선교, 벨츠와 진젠돌프의 남미선교, 아펜셀라·언더우드·마펫 등의 한국선교는 모두 주변 지향의 봉사적 사랑의 선교였습니다.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는 민족 복음화를 강조하는 신현균 목사에게 “민족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예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충고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눈은 물론 그의 자녀들을 향하고 계시지만 그보다는 ‘주변’과 ‘땅 끝’과 ‘이방’을 바라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인종적, 정치적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주변에서 신음하는 잃은 양들을 향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사회, 인권 개혁도 중요하지만 복음과 사랑을 품고 그저 주변과 이방으로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주변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2. 사례: 한경직 목사와 성 프랜시스
지금까지 기독교 복음과 영성의 특성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독교 복음과 영성은 약함 중심적이고, 착함 중점적이고, 주변 지향적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복음적인 삶을 가장 모범적으로 산 사람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성 프랜시스와 한경직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프랜시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한경직 목사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하거나 실수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 박형룡 박사님이 말씀한 대로 우리는 우리와 입장이 다른 불완전한 사람들로부터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세 가지 복음과 영성의 특성과 관련하여 한경직 목사님과 프랜시스의 삶의 특성들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복음과 영성의 특징
첫째, 한경직 목사는 약함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한평생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한 분이었고, 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인가를 체험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절망했으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를 진정한 목회자로 만든 비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919년 그가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문당한 후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27세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 박사 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그는 또 한번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 제이교회와 영락교회의 목회 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냈고 6·25 한국전쟁 중에도 약함을 드러냈고 군사독재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 노환으로 많은 고난과 약함을 체험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69년 8월 3일에 행한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약함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한평생 자기 자신의 약함과 민족의 약함을 간증한 사람이었습니다. 1972년 4월 23일에 행한 “약할 때에 강함이니라”란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첫째, 인간이 약할 때는 흔히 겸손하여집니다. 건강하던 이가 중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해집니다. 교만은 만죄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둘째, 인간이 약하여질 때에 그 생각이 깊어집니다. 인생의 깊은 문제를 탐구하게 됩니다. 셋째, 우리가 약할 때에 기도를 더하게 됩니다. 벌써 오래 전에 내가 미국 뉴멕시코 주 알바컬키라는 도시에 있던 요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제가 폐가 약하여 약 2년간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에 병석에 고요히 누워서 “약할 때에 강함이니라” 하는 성구를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약할 그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약할 때에 강함이니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한경직 목사는 착함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말이나 지식으로 설교하신 분이 아니라 착한 삶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입니다. 조향록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말이 설교하는 설교가 아니고 겸손과 인격이 설교하는 설교”였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분석했습니다.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는 바보처럼 살다가 가셨습니다. 가장 멋진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 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에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에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고 다녔습니다. 가장 안락한 아파트에 살 수 있었는데 바보같이 그것을 마다하고 “월세방에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산꼭대기 20평짜리 교회 사택에 들어갔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은 말이나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고 행동이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박사는 “그분과 같이 있을 때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느낌을 가집니다” 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관심과 사랑은 민족과 나라에 국한하지 않고 일본과 북한과 아프리카를 포함한 전 세계에 미쳤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 한국과 한국 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를 품고 사랑하며 봉사한 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57년 3월 3일에 행한 “성서적 애국심”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예수님도 애국자이십니다”라고 말하여 나라 사랑, 애국심을 강조하면서도 성서적 애국심이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적 애국심은 우리 사회에서 가끔 듣는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는 절대로 아닙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애국심은 민족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국가가 귀하지만 국가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민족과 국가가 아무리 귀하더라도 하나님 위에 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상입니다. 애국심이 잘못되어서 변태적으로 발전되면 독재주의가 되는 것이고 배타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프랜시스의 복음과 영성의 특징
첫째, 프랜시스는 버림과 청빈과 약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약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 버렸기 때문입니다. 유산도 버리고 학문도 버렸습니다. 그는 “나는 가난한 여인과 결혼을 했다”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니까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약함의 상징이었습니다. 버림과 청빈과 약함의 상징이었습니다.
둘째, 프랜시스는 모두를 사랑하는 동정과 사랑과 착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문둥병자도 사나운 늑대도, 자기를 위선자라고 부르는 사람에게도 이단도 모슬렘도 아무런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굽비오라는 마을에 사나운 늑대가 있어 밤마다 마을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두려움에 싸이게 하곤 했습니다. 프랜시스는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늑대가 살고 있는 바위 틈 가까이 왔습니다. 늑대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냥 다가갑니다. “늑대 형제여!” 하고 손을 내미니까 가만히 있습니다. “늑대 형제여,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말하며 늑대를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구푸려 늑대의 목을 껴안았습니다. 늑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프랜시스의 깊은 영성과 넓은 사랑에 감복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늑대는 굽비오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문둥병자 수용소에 성질이 사납고 포악한 환자 한 사람이 그를 간호해주는 형제들에게 대들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더러운 위선자들아, 나는 저주 받은 문둥이다. 예수의 사랑도 너희들의 사랑도 다 거짓되고 헛된 것이다.”
몸에 흐르고 있는 고름을 손바닥으로 훑어서 형제들에게 뿌리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을 본 프랜시스는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형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고름 투성이의 몸뚱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어라.”
프랜시스는 따뜻하게 데운 물로 문둥병자의 몸을 머리에서부터 차근차근 씻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프랜시스의 손이 닿는 데마다 그의 피부에서 더러운 고름이 걷히고 상처들이 깨끗하게 아물어졌고 동시에 그의 영혼도 깨끗하게 씻어지면서 그는 다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고 울면서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프랜시스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짐승들과 새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설교했습니다. 프랜시스가 사람들은 물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설교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신비주의가 아니었고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것뿐이었습니다.
셋째, 프랜시스는 가난과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주변 지향적 삶을 살았습니다.
프랜시스는 주변으로 갑니다. 마지막에는 모슬렘에게 갑니다. 아니 이단에게까지 갑니다. 신앙을 의심할 수 있겠지요. 모슬렘은 그 당시에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음을 향해서 갑니다. 저는 마지막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삶은 주님 곁에 깊이 빠진 삶인데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나도 주님의 고통을 내 몸에 지닐 수 없습니까?”
그는 죽기 2년 전 라베르나 산에서 2년 동안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나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습니까. 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한 가지는 할 수 있다면 당신께서 수난 당하셨던 고통을 제 영혼과 육체에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또 한 가지는 어떤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도록 극치의 사랑을 내게도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바로 그때였습니다. 프랜시스의 몸에는 마침 불덩이를 댄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나 그는 그만 까무라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시간 이상 쓰러져 있다가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온몸에 상처가 나 있었는데 그리스도와 같은 상처를 그의 손발과 옆구리에 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신비주의가 아니라 바울주의입니다.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다. 내 몸에는 매 맞음의 상처, 파선의 상처, 배고픔의 상처 등 모든 상처가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 그리스도의 생명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저는 가장 먼 주변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이후 죽기까지 극심한 몸과 영혼의 고통을 지니며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의 눈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몸과 영혼의 고통은 극심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무한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4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는 주님이 벌거벗은 몸으로 죽었던 것처럼 자기도 벌거벗은 몸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이 그에게서 옷들을 모두 벗겨내고 그를 맨땅에 누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 나의 모든 것,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에게 입혀주신 당신의 성총으로 이 몸이 의인들에게 둘러싸이나이다.”
그리고 둘러선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는 형제들과 여기 없는 형제들의 죄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말을 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 나의 자매 죽음이여” 그는 죽음도 사랑했던 겁니다. “오 나의 자매 고통이여, 오 나의 자매 죽음이여.”
결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너무 높은 수준의 복음적인 삶을 살았고, 너무 높은 수준의 복음적인 영성을 지녔는데 우린 너무 낮은 수준의 세속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너무나 주님 닮은 삶을 살았는데 우리는 너무나 주님 닮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한경직 목사님의 삶을 살피고 나서 처절한 고뇌와 절망적인 부끄러움을 느꼈고, 성 프랜시스의 글을 읽고 나서 무한한 충격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백 년마다 한 번씩만 성 프랜시스와 같은 사람이 태어난다면 인류의 구원은 보장되고도 남는다.”
제가 어거스틴을 공부한 만큼 성 프랜시스를 공부하고 그의 글을 오래 전에 읽었다면 저의 삶의 모습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지금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프랜시스처럼 주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며 약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소원합니다. 저도 주님 사랑 때문에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며 착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저도 주님 사랑 때문에 가난과 고통을 짊어지고 가난과 고통이 되면서 주변 지향적 삶을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여러분도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지니고, 남은 생애에 주님을 많이 기쁘시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귀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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