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Preaching

13.01.20.주일설교 : 안식의 의미(창 2:1-3)

샬렘하우스주방장 2013. 1. 21. 15:07

13.01.20.주일설교

제목: 안식의 의미 / 창세기 2:1-3

 

현대문화의 한 가지 현저한 특성이 있다면 스피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전 세계를 접속하여 온 세계의 정보를 한순간에 공유할 수 있는 인터냇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은 좀 더 편리해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딜레마는 이 편리함이 우리의 삶의 바쁨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게 되었지만, 우리들의 빠름빠름이 삶의 의미를 더해 주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로 인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고 있지만은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런 경향 때문에...베스트셀러 가운데, 불란서의 철학자이면서 에세이 작가이신 삐에로 쌍소란 사람이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이 전 세계 독자와 우리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느리다는 것을 게으름으로 정죄할지 모르지만, 이 저자는 오히려 느림이 미덕일수 있다라고 오히려 역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느림이 한 사람을 관찰할 때, 하나의 환경을 우리가 분석할 때, 또 하나의 사건을 들어다 볼 때, 객관적인 안목을 그리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이점(利點)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아침마다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는 감동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자는 연못의 어두운 물과 밤이 뒤섞일 때 그것을 느긋하게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밤의 얼굴을 최근에 목격해 본적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속도문화의 가장 커다란 비극이 있다면 안식의 상실이라고 지적합니다. 반대로 현대문화의 구원이 있다면 안식을 회복하는데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드물게 보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해서 씌어 진 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안식휴가" 하면, 팔자 좋은 소리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에게 무슨 안식의 여유가 있겠느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최근에 안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가져야만 안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가져도 안식하지 못할 수가 있고, 짤막한 시간을 가져도 그 질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안식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또 안식의 형태는 매우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안식! 도대체 안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안식을 처음으로 만드신, 그리고 안식이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안식이 필요 없는 유일하신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그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다고 오늘 본문은 기록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분을 쉬셨을까요? 여기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안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세 가지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1.첫째로 오늘 본문은, 안식은과거를 되돌아봅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일반적으로 왜 쉬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피곤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인 안식의 중요한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7일째 날에 하나님은 피곤해서 쉬신 것은 아니시잖아요? ...오늘 본문에 1절과 2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쉬신 중요한 이유가 한가지의 동사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 창세기 21절을 다시 보시죠.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그 다음에 2절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어떤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까? ‘다 이루니라지으시던 일이 다했기 때문에 그분이 쉬셨다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정리하면, 그분은 창조의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치셨다는 말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창조하신 만물을 돌봐야 하는 엄청난 섭리의 사역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타임을 브레이크 하시고 쉬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창세기 1장을 들여다보면, 그 대답을 쉽게 얻을 수가 있어요. 하루하루 창조의 과정이 마무리될 때마다 또 다음날에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한 날의 창조를 마무리하면서 그 소감을 매우 인상 깊은 한 단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나타납니까? 창세기 1장에, 예를 들어서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보신 하나님의 소감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좋았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히브리어로,‘좋았다는 단어는 "토프"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격을 담아서 말하는 "좋구나!"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안식이라는 것은 지나간 엿새 동안의 창조를 돌이켜보며 그것을 즐거워하는 시간이셨던 것을 여기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자축의 시간, celebration의 시간이었다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어떻게 우리는 적용할 수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안식이라는 것은 즐거움과 감사의 시간일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늘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냐 하면,‘죽어라고 일하다가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일한 결과를 전혀 엔죠이 하지 못하는 그런 여유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주변에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예외 없이 지나치게 바쁘고 서둘러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쫓겨 가고 있는 삶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한 기독교문화 신학자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세속적 가치관에 설득되었거나 영향을 받은 까닭이라고 지적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가치관의 하나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입니다. 혹은 기능주의적 가치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는 시간이 생산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에요. 그러나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가치관 중에는 심미적 가치관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솜씨와 창조를 바라보는 여유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 앞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 엄청난 홍해바다 앞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했습니까? 이렇게 시작됩니다.“그만 가만히 있으라! 당황해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라고 모세는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서두르는 제자들에게 잠시 길을 멈출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좀 바라보라!”전도 갔다 와서 서둘러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잠시 중단하자고, 먼저 가서 쉬자고 제안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리고 이미 역사하신 그분의 역사하심을 좀 생각해보라고,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깊이 있는 생각으로 바라보면, 이 바라봄 속에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거기서 찬양이 나와요. 바라보면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배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가 개인으로 경험한 가장 커다란 축복이 있다면 제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바쁘게 쫓기다 보면, 우리는 늘 신경질 나는 삶의 반응을 보이기가 쉽습니다. 때로는 불평했지마는, 때로는 안타까워했지마는, 때로는 원망했지마는... 그러나 돌이켜 보면...내 삶의 발자국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볼 때에 저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감사하구나!!!”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준 아내가 감사하고, 말없이 함께 기도로 같이해준 기도의 동역자들이 감사하고, 교회가 감사하고 또 부족한 사람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따라준 여러분들이 감사하기만 하고, 때로는 제 마음에 버거움과 고통을 가져다주었던 사람들까지도 감사하더라구요. 안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한해를 시작하는 연초에 여러분들에게 과거를 돌이켜보는, 그리고 예배를 회복하는, 감사를 회복하는 이런 안식의 여유가 주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둘째로, 안식의 의미는 현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 안식일의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과거를 돌아봄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메시지가 오늘 본문 3절에 있습니다. 3절을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여기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안식이란 날을 구별하신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의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날을 축복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여기서구별하다는 뜻이 더 합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과 구별하여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거룩한 삶으로 이끄시는 당신의 부르심에서...”여기서 우리는 안식을 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날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정말 축복 되고,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을 그 분은 기대하신 것입니다.

 

6일째 온천지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고...보기 좋았다 하시면서...7일째 날에 쉬신 것이 하나님이 피곤하셔서 안식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하고 쉴 때 반드시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런 안식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축복 된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있겠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최근에 비로소 중세기의 수도사들이 수도하는데 힘들다가 안식년을 맞이하면 더 깊은 광야, 더 메마른 사막으로 나가서 안식년을 가진 이유를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예배와 기도에 전념하면서 그들은 영성을 다시 회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언제가 시골에 가서 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 깊은 안식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서 광야에 가서 수도해야 한다고 여러분에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의 계획이 무엇이든...그것이 나를 거룩하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나를 건강하게 하면 됩니다. 일요일은 들로 산으로 놀러가거나, 아니면, 피곤해서 지쳐서 곯아떨어지고 교회도 가지 않는 그런 무질서와 피곤이 아니라...안식일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거룩함과 건강함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어서 또 다른 한 주간을 준비하는 시간이 안식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그리는 천국을 공부하다가 저는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스가랴 선지자는 회복된 예루살렘, 혹은 새 예루살렘, 시온의 거리, 천국의 거리를 그리면서 성경은 이렇게 그립니다. "그 성읍 거리에 동남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치리라" 천국은 천진난만한 어린 소년 소녀들이 장난 치고 있는 거리, 이렇게 성경은 묘사합니다. 놀이는 죄악이 아니에요. 건강한 놀이는 우리의 여가와 우리의 안식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교육은 놀이를 정죄하는 풍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 있어서 아마도 한국 부모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 단어일 것입니다. 하나는 뭡니까? "공부해!" 그리고 또 하나는 무얼까요? "놀지마!" 그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학은 놀이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놀이는 학습입니다. 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건강한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볼링이 기독교에서 만든 것이란 것을 아십니까, 볼링 교과서를 보시면, 볼링의 시조가 종교개혁을 주창한마르틴 루터라고 되어있습니다. 본래 볼링은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다가 잠시 쉼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 공놀이를 하던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놀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놀이가 나의 인생에 활력을 더해줄 수가 있다면, 육체적이고 정서적이고 영적인 회복에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놀이도 안식의 한 방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놀이만 해야 되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훌륭한 안식일 수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제가 안식년이 되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란서 남부에 있는 떼제 공동체란 곳이 있습니다. 대체로 유럽의 영성은 깊은 밤이고, 어둠입니다. 그런데 떼제의 언덕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넘쳐흐르고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저에게도 있어서, 이것이 큰 경험이고 은혜의 통로라고 믿습니다. 신학교 때부터 해마다 태백산 산골 깊숙이 있는 예수원에 들어가서 23일을 있다가 오곤 했는데...바로 그곳에서도 절대 침묵입니다...조용히 걷거나..묵상..하는겁니다. 그러면...내면에 평안을 얻고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교회가 커지더라도 주일에 바쁜 것은 통 안하려고 합니다. 여선교회든, 남선교회든 간에...봉사하고 구제하고 바쁜 것..다 올스톱...꼭 필요한 것만..하고 나머지는 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따금씩 아플 때 우리가 무얼 합니까? 아프면 아무것도 못하지요.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런데 며칠 지나면 치료가 되잖아요. 그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음, 그것이 나쁜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일부러 그런 시간을 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유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얼마나 이 안식이 필요하겠어요? 안식은 곤고한 나의 현재를 새롭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일부러라도 안식의 가치를 발견하고 안식을 찾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은 우리의 현재를 새롭게 함인 것입니다.

 

3. 세번째로 안식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안식은 결코 안식 그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만약 안식자체에 의미가 있었다면, “하나님이 쉬셨다! 그리고 성경이 거기서 끝나야 되요.” 창세기 23절로 성경이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죠? 하나님은 그 다음에 다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그가 창조한 만물을 돌아보시고, 인생을 돌아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류의 위대한 섭리를 그 안식의 타이밍을 통해서 더욱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안식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미래를 플래닝(계획)하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안식의 또 하나의 의미요, 축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은 결코 낭비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한 기독교문화 신학자는 안식을 가리켜서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괄호라고 그랬어요. 창조적인 괄호. 괄호 알죠? 글 쓰다가 괄호. 잠시의 쉼. 그러나 그 쉼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같은 저자는 그의 책을 통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류의 문화의 발전은 뜨거운 폭염에 태양이 내려 쪼이는 노동의 현장에서만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비 오는 날의 동굴 속이야말로문화의 산실이였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비 오는 날의 동굴 속을 생각해 보세요. 펑펑 비가 쏟아지는 날, 옛날 원시인들이 동굴에서 무얼 했을까요? , 비 쳐다보는 거죠 뭐. 그저 앉아서 비 오는 것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쳐다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지나갔을 것입니다. 이 아이디어야말로, 그 생각 속에서 튀어나오는 아이디어야말로 문화의 불꽃, 창조의 불꽃이였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인류문화의 역사가 그렇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저는 고향이 울산인데, 옛날 어릴때 양철지붕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리듬도 있고 그 비가 처마 밑을 따라 떨어지는 비를 보는 것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창문너머로 비켜치는 비를 보면서 상념에 젖기도 했어요, 이런 버릇이 요즘도 비오는 날이면, 일부러 우리 부부가 창문을 열어둬요. 그리고 그날은 비소리를 들으면서 굉장히 행복하게 잠들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왜 보다 건강한 미래를 만들지 못할까요? 생각 없이 서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커다란 진통과 아픔, 무엇 때문일까요? 졸속 때문입니다. 서두름 때문입니다. 빠름빠름이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kt회사에서 섭섭하게 생각할지 몰라도..우리는 너무 많이 서두르고, 그리고 너무 실수를 많이 저지르고, 우리는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쉬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쉬어갈 수 없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특별히 한국 사람들. 우리 한국인들이 더 바쁘게 살고 있어요. “빨리 빨리가 세계적인 한국어가 되어버렸습니다.“본래 한국인들이 급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라고 말합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그 밥을 짓던 모습을 보면, 오랜 시간동안 밥을 만들고 뜸을 들이고 온기를 피워내고 아랫목에 그 밥그릇을 조용히 묻어두고 있다가, 때가 되면 가족 식구들이 마침내 밥상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나누던 시간들이 추억처럼 떠오르지 않습니까? 불과 30-40년전에..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바빠졌느냐? 라면이 나온 때부터 바빠졌다. (라면이 나온 때부터)소위인스턴트 문화가 출현한 그때부터 한국 사람들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인스턴트 문화 속에서 우리는 너무 급해지고 있어요. 너무 여유를 잃어버렸어요.

요즘 제가 누릴 수 있었든 가장 커다란 축복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입니다. 작년에 일산으로 교회를 이전하고 근 6개월을 혼자서 목공하고, 바닥붙이고, 카페탁자, 의자 만들고, 그러면서 자유했습니다. 단순하면서 깊은 생각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현실이 주는 무게는 무겁지만, 제 생각은 무척 자유롭습니다. 앞으로 이런 생각들을 샬렘하우스 사역, 샬렘미니스트리를 통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묵상하는 힘으로 사는 것(관상적인 삶)여러분의 인생의 길에도 이런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조급함에서 자유하십시오. 느긋하게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의 그 멋진 간섭을 기대해 보십시오. 인생은 짧지만, 각자의 삶에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말 한 분의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오늘날 어떻게 저와 여러분은 이 안식을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반대로...왜 우리는 안식을 잃어버렸을까? 라는 질문을 해봐야합니다. 그럴 때...성경은 한마디로 우리가 안식을 잃어버린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우리 마음 속에서 평안을 빼앗아갔어요. 죄가 우리 마음 속에서 여유를 빼앗아 갔어요. 죄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속에 독기 서린 한을 우리의 속에 심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든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자살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이런 죄 많은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왜 일까요? 그분은 어느 날 팔레스타인의 피곤하고 지쳐버린 군중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이 들리십니까~삶의 무게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그 분은 쉼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 오는 순간,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우리는 죄의 용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평안이 회복됩니다. 그는 진실로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을 잃어버렸습니까? 다시 그 분 앞에 오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십시오.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그 풍성하신 은혜 그리고 그의 그 넓은 평안 안에 거해 보십시오. 내 안에서 그 안식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