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Seminar

[한신별세세미나-19차]_영성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영성적 목회자가 섬기는 영성 교회: 이성희 목사)

샬렘하우스주방장 2013. 8. 9. 16:54

 

영성적 목회자가 섬기는 영성 교회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서론

 

최근에 와서 영성에 관한 관심들이 참 많아지는데 한 6년 전쯤에 혼자서 미래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그런 예측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가 가장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분야가 있다면 영성 분야와 리더십 분야, 즉 지도력 분야다 했습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연구해야 될 과목들이 많아지는데 특별히 영성과 리더십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도 제가 볼 때에는 당분간 상당히 중요하게 연구되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정보화 사회가 되면 점점 더 영성에 관한 관심들이 많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리더십 문제는 왜 중요한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요즘에는 리더십이라는 것을 굉장히 많이 연구하고 책도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리더십이 참 중요하다, 문제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현대인들의 인간형을 말할 때에 거미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정보 사회를 웹 사회라 말하지 않습니까? 웹사이트, 웹진, 웹마스터 등 웹이라고 많이 얘기하는데 사실 웹이라는 말은 거미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미줄 사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미줄 사회의 사람들을 보면 거미같이 살아갑니다. 바꿔 말하면 거미가 항상 거미줄을 친 다음에 보면 제일 한가운데 중앙이 거미의 자리예요. 그러다 보니 웹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중심적, 자기가 정 중앙에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위에서 한마디 하면 먹히는 시대였지만 요즘은 전부 각자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어떤 한 리더가 전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합적인 구조 속에 몰아넣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리더십이 중요하게 되고, 어렵다 말하게 되고, 리더십에 관한 책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쉬운 리더십이 요즘에 와서는 굉장히 어려워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향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고 상향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회사들이나 조직체에서 보면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옵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올라와서 위의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소위 역방향의 지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사고가 빨리 바뀌지 않아서 굉장히 힘들어요. 위에서 한마디 해도 잘 안 먹혀들어갑니다.

회사 사장들도 사실은 좋은 시대는 다 지났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밑에서들 올라오니까. 예전에는 사장이 한마디 하면 밑으로 쭈욱 먹혀들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통령도 못해먹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결국은 리더십의 방향이 바뀌었다, 중심이 이동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정보 사회를 살아가면서, 이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중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대라 말합니다만 이 포스트모던 시대는 결국 영성이 굉장히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앨빈 토플러 같은 사람은 제5의 물결은 영성이다라고 말합니다. 앨빈 토플러 같은 문명 비평가들의 말을 빌리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제4의 물결의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4의 물결의 시대란 기조 자체가 일치와 공동 창조의 시대다라고 말합니다. 공동 창조라는 것은 기업은 기업대로 공동 창조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교파에 대한 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제가 신학교 졸업할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장로교회 외에는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왜 장로교인이 되었는 줄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우리 아버님이 장로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통합측 목사가 됐는 줄 아십니까? 아무 이유 없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통합측 목사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예 장로회신학대학교 외에는 다른 학교는 쳐다본 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 구조는 그랬다는 겁니다.

최근에 와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운 동역자들, 친구들을 보면 교파를 초월해서 함께 교제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모여서 말씀도 전합니다. 이것이 제4의 물결의 시대 특징입니다. 제5의 물결의 시대는 바로 영성의 기조라 해서 앨빈 토플러 같은 사람은 아예 영성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성이 바로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살아가는 세상을 한마디로 정보, 지식, 기술 등등 이런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점점 과학적으로 살다 보니 그 과학에 대한 역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Reaction이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즉 과학을 벗어나서 초과학적인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시면 요즘에 우리가 얼마나 잘 먹고 삽니까? 정말 잘 먹다 보니까 성인병도 많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건강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고, 웰빙이라는 말도 많이 쓰게 되고, 이 말을 많이 쓰다보니 요즘엔 참 삶이란 말도 나오는데 이건 왠지 좀 어색해요. 어쨌든 우리가 웰빙 식품을 많이 선호하지 않습니까? 요즘에 비싼 돈 주고 멀리 교외까지 가서 시골밥상이라 해서 보리밥 사먹고 그러지 않습니까? 너무 잘 먹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Reaction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정보, 과학, 기술 이런 것들에 싸여 살다 보면 거기서부터 벗어나고픈 생각들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래너드 스윗의 책을 꼭 한두 권 보기를 바랍니다. 제가 두 권을 소개해 드리는데 한 권은 「모던 시대의 교회는 가라」입니다. 이제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이기 때문에 모던 시대의 교회는 지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그 책의 이름은 Aqua Church, 물 교회란 제목의 책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앞으로 목회할 날이 5년 이상 남았다 하면 이것을 꼭 보시고 5년 안에 내가 별세할 것이다 생각하시면 안 봐도 괜찮습니다. 두 번째는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미래」라는 책입니다. 이 두 권을 래너드 스윗이 썼는데 꼭 보십시오.

이분의 말을 들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소위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와 그 모든 패러다임 전체가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고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람들 속에 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위 말하는 신비, 신비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점점 사람들 속에 신비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 미래 리포트」라는 책을 보시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목회를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통계적으로 다 나와 있습니다. 그중에 이런 대목이 있는데, 무종교인에게 만일에 당신이 종교를 갖는다면 어떤 종교를 갖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제일 많은 게 천주교, 두 번째가 불교, 세 번째 응답이 개신교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개신교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싸움을 많이 한다, 대형 교회들이 문제가 많다 그런 것도 있지만 통합적으로 묶어 한마디로 개신교는 신비감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신비라고 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우리 목회자들도 뭔지 모르지만 신비감을 상실하지 않도록, 천주교나 불교와 같은 그런 형태의 종교 형식을 가질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신비감을 잃지 않도록 하는 노력은 다분히 계속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에 그것을 자꾸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은 우리가 무종교인들로 하여금 우리 개신교에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자꾸 빼앗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영성적인 성향이 많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영성에 대한 관심들을 굉장히 많이 가집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만 영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도 나름대로 영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이데올로기가 영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불교의 영성이 있고, 신비 종교도 나름대로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당도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성과는 다릅니다.

영어 spirit에서 s를 대문자로 쓸 때에는 성령을 지칭하고, 소문자로 쓰게 되면 일반 영, 잡영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이라고 하는 것도 대문자로 씁니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정말 건강한 성령님을 통한 영성은 대문자로 쓰고 일반 잡된 영성은 소문자로 씁니다. 어쨌든 다른 모든 종교들, 이데올로기가 영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건강한 영성을 제공해 주지 못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뚱한 영성에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존 네이스비츠 같은 사람은 굉장히 강조하는데, 앞으로 21세기에는 이단 사이비가 굉장히 많아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영성을 추구하기는 하는데 건강한 영성이 아니라 엉뚱한 영성을 붙잡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단 사이비가 많아지게 될 거라는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는 영성의 시대다라고 하는 말이나 21세기는 이단 사이비가 많아진다는 말이나 똑같은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교회는 건강한 영성을 제공해 주는 영성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정말 영성을 제공해 주지 못하면 사회는 점점 영성, 영을 바라는데 엉뚱한 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이 앞으로 영성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교회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성적 기능(Spiritual function)이고 다른 하나는 예언자적 기능(Prophetic function)입니다. 이 두 가지 기능이 균형을 이루어야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사가들은 말합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왜 급속도로 냉각되었느냐? 왜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었느냐?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 까닭은 예언자적 기능에 너무 치중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적 기능이 뭡니까? 사회에 대한 비판 기능입니다. 이것만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까 영성적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영성적 기능의 핵심이 뭡니까? 영혼 구원입니다. 그런데 영혼 구원보다도 사회에 대한 비판 기능이 더 높아지게 되니까 결국은 교회가 급속도로 쇠퇴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사가들이 말하는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과서 아닙니까? 교본입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많은 교회들이 쇠퇴한다고 말하지만 흔히 말하는 성장하는 교회, 복음적인 교회의 특징 제1번은 전도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 이것만 가지면 교회는 절대적으로 쇠퇴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없애자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문제가 많이 생겼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영성에 대한 관심들을 많이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결국은 영혼 사랑에 대한 관심입니다.

1907년도 한국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Again 1907 하면서 굉장히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2007년. 한국이 다시금 새롭게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영성 회복에 관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영성이 회복되면 영혼을 사랑할 것이고, 전도도 많이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이 부흥입니다. 우리가 영성을 회복하려면 회개 운동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주신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항상 영성의 제공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영성가들도 영성에 대한 정의를 각각 다르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성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참 재미있는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정말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보아야지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숨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다 알잖습니까? 다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가 쓴 「삶을 변화시키는 영성을 찾아서」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영성에 대한 통전적인 개념을 주는 책으로서는 이 책이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습니다. 우리 속에는 정신과 영혼이 있으며, 그 영혼에 대하여 우리가 취하는 행동이 영성이다라고 말하면서 참 재미있는 표현을 하였는데, 그는 영성을 우리가 에로스를, 그 사랑을 어디에 집중하느냐? 하면서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영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정말 자기 마음속에 있는 에너지, 사랑을 한 곳에만 쏟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없습니다. 돈 가진 사람들을 보면 돈 좀 가지게 되면 평생 돈만 벌다가 딴 잡생각 안하고 사는 사람 못 봤거든요. 돈 많아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꼭 이상한 데로 빠지는 것을 봅니다. 정치에 빠지든지, 정욕에 빠지든지, 반드시 다른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돈에만, 평생 돈밖에 모르고 돈 외에는 관심을 안 가지는 사람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어떤 것도 에로스를 한 곳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성이 바로 그런 것이다라고 로널드 롤하이저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느 책을 보니까 정말 영성에 대해 너무 멋지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영성이란 타자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변해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의 영성은 관계의 영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영성은 관계의 영성입니다. 나 혼자의 영성이 아닙니다.영성가들은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동양 신비주의, 소위 말하면 묵상과 기독교의 묵상이 다른 점이 뭐냐? 동양적인 신비주의 묵상의 목적은 비우는 것이다. 내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영성의 초점은 내 자신을 채우는 것이다.

다릅니다. 우리는 비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채워야 됩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해 비운다 해서 비워집니까? 안 비워집니다. 비우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 보십시오.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옵니다. 중요한 것은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영성과 일반적인 영성은 엄격히 다른 것입니다.

심지어는 최근에 와서 묵상법은 같다 해서 스님과 신부가 같이 묵상하는 것을 보았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묵상의 방법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취하는 것이 다르잖아요. 얻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같을 수가 없어요. 어쨌든 우리가 정말 타자를 위해서 내 자신이 변해가야 합니다.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회 신학자인 존 매쿼리는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의미에서 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너무 이성에 치우쳤습니다. 반면에 수도원적인 신비 신앙은 너무 정의적인 면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영성신학에서는 영성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객관적인 영성과 주관적인 영성입니다. 제가 볼 때 객관적인 영성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십자가 영성

 

십자가야말로 최고의 영성입니다. 특별히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야말로 영성의 최고봉에 있다고 말합니다. 프랜시스 살리지오라는 사람이 말한 대로, 우리 성도들은 갈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만 중보하고 십자가에서만 묵상하고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영성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 왕국입니다. 프랑수아 바리용은 모든 영성은 십자가에서 만난다. 그렇게 말할 만큼 십자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는 고난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고난받는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이다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까지만 봐도 정말 기가 막힌 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했다면 십자가랑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의 사형틀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다고 가정하면 예수님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만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었는데 어디서 일체가 되었느냐, 십자가에서 일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은 영성의 최고봉입니다. 정말 그 말 한마디만 하더라도 엄청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고 일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최고의 영성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영성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성공회 신부님이 계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성공회 신부님이나 가톨릭 신부들, 그리고 정교회 사제 역시 가까이 지냅니다. 그분들 통해서도 나름대로 배울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성공회 신부님과 함께 회의를 한다거나 NCC 같은 모임에서 만날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회의 마치면 밥을 먹습니다. 밥 먹을 때 기도합시다 하면 식사 기도를 하는데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나자마자 성공회 신부님이 자신들만의 행위를 합니다. 그때 제가 그럽니다. 왜, 아멘 가지고 모자라냐? 항상 아멘 후에 성호를 긋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저와 똑같은 질문을 가졌었습니다. 자기도 성공회 신부 친구가 있었는데 꼭 식사하고 나면 아멘 하고 성호를 긋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스 루케이도가 자기 친구에게 물어 보았답니다. 식사할 때마다 기도 마치고 나서 아멘 하면 됐지, 왜 성호를 하느냐? 그랬더니 친구가 이렇게 설명하더랍니다. 물론 미국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하면 대문자 I 자이지요. 대문자 I는 나 아닙니까? 나를 자른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자기는 항상 내 자신을 잘라낸다, 내 자신을 죽인다는 의미에서 성호를 긋는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이 참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내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거기에서 내가 죽는다, 내가 잘라진다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개신교 목사들은 밥 먹을 때마다 성호를 긋지 아니하지만 의미는 참 좋겠다, 정말 십자가상에서 내가 죽어지고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죽인다, 자른다 라고 하는 그 상징을 가진다는 것은 참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성이라고 하는 말은 페사흐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고난, 고통, 죽음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못 박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못 박혔다는 의미는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죽으심을 얘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 말은 내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참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서 어떻게 내가 삽니까? 내가 죽었는데. 그런데 이제부터는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신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성이 뭐냐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되어서 그 다음에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체되는 것입니다.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소위 말하는 영성입니다.

여러분, 두 발자국 이야기 다 아시죠? 나와 예수님이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고통 당하고 있을 때 한 사람 발자국밖에 없었다. 나는 예수님께 물어봤다. 제가 한창 고통 당할 때 예수님 어디 가셨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바로 내 발자국이다. 내가 너를 업고 갔느니라.’”

예수님이 나와 일체가 되어 업혀 살아가는 겁니다. 업혀 살아가면 얼마나 편합니까? 내가 하려니까 복잡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살아가면 엄청나게 편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참 재미있는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영성적 경험을 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한 영성적 존재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되고 영성적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평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고 하는 사실은 정말 멋있는, 정말 아름다운 삶입니다.

 

3. 인간과 영성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사람을 영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놓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사람은 생령입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영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영적으로 살 때 사람이에요. 사람은 죽은 영이 아닙니다. 사람은 산 육이 아닙니다. 물론 죽은 육도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영일 때 비로소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멀쩡하게 눈 뜨고 다니지만 사람 아닌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영적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야 비로소 보람을 느끼고 참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른 뼈들이 막 흩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물어봅니다. 에스겔아,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때 에스겔이 뭐라 합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애매하게 대답을 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뼈들을 다 만나게 하시고 힘줄을 생기게 하고 근육을 생기게 하고 피부가 다 입혀진 다음, 뭐라고 합니까? 생기들아, 모여라. 그 속에 들어가라. 거기 들어가니까 군대가 됩니다. 아무리 뼈가 모이고 힘줄이 생기고 근육이 생기고 살이 입혀져도 생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군대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입니다. 생기 때문에, 영 때문에, 하나님의 숨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숨으로 불어넣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글자, 똑같은 글자 아닙니까? 신문에 나오는 글자, 똑같은 글자이지만 우리는 성경책을 통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 곳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천국도 알고 다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었다는 것이 감동입니다.

똑같이 보는 사람이지만 그 속에 숨결이 있는 사람과 숨결이 없는 사람은 표가 납니다. 영적인 사람과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표가 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생령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경험을 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한 영적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야 실제로 보람 있는 삶을 쓸 수 있습니다. 토머스 머튼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되려면 우리는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주셨던 원래의 생기,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영성, 이것을 다시 회복하는 작업입니다. 저는 제2의 종교개혁의 틀은 우리가 상실했던 하나님의 생기를, 하나님의 숨결을 다시금 회복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 교회가 영성만 회복하면 정말 힘있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세 가지 영성이 있다. 존재의 영성과 관계의 영성과 사역의 영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존재의 영성을 올바르게 갖추지 못하면 관계의 영성과 사역의 영성을 올바르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존재의 영성이 제1차적인 영성입니다.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존재의 영성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고 하는 존재의 영성이 잘되지 않으면 다른 데 가서 어떤 역할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즉 관계의 영성입니다. 그 다음에는 과실을 많이 맺는다, 즉 네가 내 안에 있으면, 서로 사랑하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역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열매가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은 존재의 영성 없이는 사역의 영성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이고, 이웃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여기서부터 사역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내 모습,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라고 하는 이 영성, 이 자존감이 나아가서 사역의 영성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겁니다.

여러분, 이사야서 6장 말씀을 보면 1절에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잘 보세요. 1장에서 5장까지 이사야가 뭘 했습니까?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저주도 전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6장에 가서 비로소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5장까지는 말하자면 나가서 열심히 했지만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내 맘대로 한 겁니다. 내 기분대로 한 것입니다. 내 기분대로 다른 사람을 저주한 것입니다. 술취한 자여, 화 있을지어다. 자기를 지혜롭게 보는 자가 저주를 받을지어다. 1~5장을 보면 8번씩이나 다른 사람을 저주합니다. 자기 자신은 저주 안합니다.

그러다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니까 뭐라고 합니까? 화로다, 나여라고 합니다. 자신이 화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영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전부 다른 사람을 저주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니까 자기를 알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영성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존재의 영성 다음에 관계의 영성을 가지게 됩니다. 마지막에 사역의 영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묻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이제까지 자기 마음대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지금까지 한 것 전부 다 없던 걸로 하고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존재의 영성, 관계의 영성, 사역의 영성. 이것을 하나씩 잘 준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역의 영성이 정말 빛나게 되기를, 열매 맺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삶과 영성

 

우리 삶의 영성은 독단이 아닙니다. 나 혼자 영성적 존재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성은 항상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성은 삶의 영성입니다. 삶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타자를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변해가는 과정이 영성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영성적 존재이지 영성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성적 훈련을 많이 하고 아무리 고상하게 산다고 하더라고 영성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영성은 우리가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Process)입니다. 우린 영적인 존재이지,영 그 자체는 아닙니다. 영성은 객관적이어야 하고 타자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삶에서부터 영성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내 삶이 영성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영성이 내면적인 영성이라면 관계의 영성은 타자와의 삶을 위한 영성입니다. 관계의 영성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 영성은 공동체 영성입니다. 삶의 영성입니다. 저는 삶의 영성을 도덕성이라 해석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거의 다가 도덕성 문제입니다. 현재 어려워지고 있는 교회를 보십시오. 대형 교회 몇 교회들은 문제가 많습니다. TV나 신문에 나옵니다. 잘 보십시오. 도덕성 문제입니다.

목사가 설교 못한다고 쫓겨나는 거 봤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인들이 열심히 기도만 하면 설교에 은혜 받습니다. 좋은 설교는 목사와 성도의 합작품입니다. 만나를 보십시오. 만나가 말씀 아닙니까? 만나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고 백성들은 나가서 해뜨기 전에 거두어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줘도 못 거두면 굶고, 아무리 나가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못 거둡니다. 저는 말씀은 신인 합작품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출애굽 공동체를 보면 처음으로 일꾼을 세웁니다. 모세 혼자서 다 못하니까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웁니다. 그들의 자격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무망한 자이며, 불의한 일을 미워하는 자를 빼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삼아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영성적인 사람입니다. 진실무망하고 불의한 일을 미워하고, 이것은 도덕성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영성적인 사람, 도덕성이 있는 사람을 세워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삼으라는 말입니다.성경 말씀을 쭉 묵상하면서 깜짝 놀란 것은, 구약성경에 이들을 세운 조건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십부장은 자격이 대충이고 천부장은 엄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장로의 자격은 엄격하고 서리집사는 적당히 하지 않습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잘못입니다. 서리집사나 장로나 심지어 목사까지도 자격은 똑같아야 됩니다. 정말 영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처음으로 교회가 일꾼을 세우는데 그 자격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는 영성이 칭찬 듣는 도덕성을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을 보십시오. 감독은 이와 같이……집사들도 이와 같이……여자들도 이와 같이…… 쭉 나옵니다. 잘 보십시오. 거의 다 도덕성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술에 인박이지 말고 참소하지 말고…….

정말 교회 일꾼들이 도덕적이냐 그 말입니다. 정말 영적이냐 말입니다. 제가 볼 때 도덕성은 삶의 영성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을 삶에서 어떻게 나타내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이 도덕성이지 딴 것이 있습니까? 정말 영성적인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비영성적인 사람이 비도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성과 도덕성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성은 도덕성을 만들어낸다고 봅니다.

토머스 머튼은 말하기를 영성에 있어 비현실성에 빠지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항상 영성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현실성을 벗어난 영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 삶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변화에 깨어 있고, 거룩성에 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양면을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유함과 경건함, 행동과 묵상,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의 정의 등 항상 양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과 하늘에서의 삶을 함께 삽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했지만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기도문에 뭐라고 했습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양면성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셔서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영성은 이 땅에 살면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삶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것 아닙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정의롭게, 평화롭게 사랑으로 이 땅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롭게 살지 못하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주기도문을 암송한다면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도록 살아가야지 그 기도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흔히 말하는 양면성입니다.

 

5. 영성과 훈련

 

영성은 날마다 훈련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새벽에 만나를 백성들 스스로 거두게 하셨습니까? 훈련이었습니다. 훈련의 기초는 영적 수련입니다. 영적 수련을 통해서 훈련이 가능합니다. 영성가들은 흔히 영성 수련에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금식과 기도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읽은 책 가운데 드와이트 에드워즈의 「내면의 혁명」이란 책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날마다 재회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이미 회심했잖습니까. 회심 안하고 목회자 되겠습니까? 다 회심했겠지만 그러나 순간순간 다시 회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수도사들의 삶을 보고 싶어서 저는 재작년 안식 기간에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들어간 수도원은 350년경에 애굽의 사막에 세워진 수도원입니다. 1,700여 년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소위 성무 일과를 매일 반복하는 수도원입니다.

이 수도사들은 수도원에 들어갈 때 3가지 서원을 합니다. 첫째는 가난(Poverty)하게 살겠습니다. 둘째는 순결(Chastity)을 지키겠습니다. 셋째는 순종(Obedience)하겠습니다. 매일 아침 새벽 예배가 2시간입니다. 2시간 동안 서서 새벽 기도합니다. 저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너무 더워서 잠도 못 자겠는데 새벽에 종 치면 나갑니다. 나가면 수도사들이 전부 서서 2시간 동안 중얼중얼합니다. 지금도 콥트어(고대 애굽말)로 합니다. 콥트어는 헬라말과 비슷해요. 그래서 중간중간 알아듣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새벽 기도할 때마다 처음 수도회 들어왔을 때 약속한 3가지를 매일 말합니다. 그것을 영속적인 회심(Perpetual conversion)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목사 될 때 처음 서약하던 것을 매일 새벽 기도할 때마다 하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얼마쯤 지나면 무슨 서약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영속되는 회심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수도사들은 매일 합니다. 그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처음 한 그 서약과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겁니다. 매일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수도원에서 하는 것은 3가지인데 기도하는 것과 학습·공부하는 것과 노동하는 것입니다. 예수원 가신 분은 알겠지만 대천덕 신부님이 항상 강조하시던 것, 노동은 기도입니다. 일하는 것도 기도이고 영성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안에 가 보시면 모든 것을 자급자족합니다. 소젖 짜서 치즈 만들고, 얼마나 단순한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옷도 수도사복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잠잘 때는 잠옷, 일할 때는 노동복, 평상 때는 평상복입니다. 항상 그것을 입습니다. 달랑 한 벌입니다. 같은 옷 두 벌 가지고 빨고 입고 빨고 입고 합니다.

이분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수도원 삶을 우리가 어떻게 가정생활 하면서, 사회생활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가난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살면서도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순종해야 합니다. 영성을 잘 배워서 세상에 나가서 다시 한번 재창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내가 얻고 싶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속적 영적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의 훈련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성을 얻기 위한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십니다.

 

6. 한국 교회의 영성 쇠퇴와 영성 회복

 

한국 교회는 점점 영성이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제가 제 나름대로 한국 교회를 분석하면서 연대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1996년부터 한국 교회가 영성적으로 쇠퇴한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 해에 환생, 전생 신드롬이 사회를 지배하였고, 젊은이들 사이에는 만득이 시리즈가 유행하였습니다. 1995년도부터 나왔습니다. 무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에 무당이 60만입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 상대로 점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이 영성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엉뚱한 영성 쪽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영성적으로 쇠퇴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종교개혁(Reformation)과 르네상스(Renaissance)의 공통점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질로 돌아가자입니다. 개혁이 뭡니까?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한국 초창기 때 가지고 있던 그 영성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열정으로 돌아가자입니다. 1907년 그 당시 가지고 있던 복음의 불길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기복적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한국 기독교사에 나타난 한국 교회의 모습은 기복적이 아닙니다. 이전까지 한국 교회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이 전도요, 설교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다시 교회의 본질적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7. 21세기와 영성

 

21세기는 말씀드린 대로 점점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앙드레 말로는 21세기는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신비, 종교, 영성 등이 점점 사람들과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세기를 목회할 우리는 정말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미래학을 아무리 공부해도 거기에 영성이 없습니다. 진단밖에 안 나옵니다. 해답이, 처방이 뭐냐 하면 영성입니다.

여러분이 영성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정말 내 자신이 영적으로 변하고 그 다음은 관계의 영성입니다. 관계의 영성을 회복하면 사역의 영성은 저절로 배우게 됩니다. 내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영성적인 목회자가 되어서 영성적인 교회를 일구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성 시대에 교회가 건전한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지 못하면 사회는 건전치 못한 영에 미혹됩니다. 정말 우리가 영적으로 재생되어서 한국 교회를 새롭게 일구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