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영성
이정익 목사 (신촌성결교회)
1.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이란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느껴지는 따뜻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가 아니고 목회자가 풀어 쓴 표현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느껴지는 따뜻하고 포근하고 든든하고 만족스럽고 그러면서도 행복함,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성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향하는 내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가에 있는 풀들을 보면 풀이 물가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유심히 보십시오. 물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또 산에 가서 나무를 보면 전부 햇볕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에게로 마음이 향합니다. 인간은 거부하지 않는다면 자연적인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영성입니다. 그렇게 흐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고 ‘영적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2. 영성의 두 종류
영성은 두 종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주어진 영성이고, 또 하나는 내가 만드는 영성, 즉 계발되는 영성입니다. 주어진 영성을 은사라고 하면, 만들어 나가는 영성은 내가 계발하면 계발할수록 깊어지고 커지고 위대해지는 영성입니다. 여러분, 육상경기 하는 선수들이 연습과 훈련을 하면 할수록 경기력이 향상되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하는 사람과 하는 사람은 월등하게 차이가 납니다.
훈련과 연단은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때로 금식을 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고, 기도 생활을 하고, 묵상의 삶을 살아가면 영성이 계발되는 것입니다.
3. 영성 계발의 조건
우리 생활 속에서 목회자들이 영성을 계발하고 발전시켜서 성숙해 나가고 깊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나타나는 조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묵상
저는 기도 가운데 묵상을 참 좋아합니다. 조용한 기도 말입니다. 사실은 소나기보다 이슬비가 훨씬 유익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소나기같이, 불같이 그러는데 그런 기도 고쳐야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불같이 뜨거워지면 금세 타버립니다. 영성 생활, 신앙생활은 어려서부터 차츰차츰 익어와야지, 좋은 목회자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속까지 푹 익어야 되는데 ‘소나기같이, 불같이’ 이것은 소망적이지 않습니다.
묵상의 기도가 참 좋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고 그 시간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나는 응답하는 시간, 이것이 영적으로 아주 살찌는 시간입니다. 영성이 푹 익어지는 시간입니다. 괴테는 “영감은 고독 속에서도 얻어진다.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목회자들이 때로 산에 가는 것은 좋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 안해도 괜찮습니다. 니체는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쾨니히스베르크의 호젓한 호숫가를 거닐어라”고 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내 속에 잠재되었던 영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그 깊은 영혼의 세계에서 좔좔 흘러오는 영혼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고요 속에서 듣는 것입니다. 호젓한 호숫가를 거닐 때, 산을 거닐 때, 묵상의 시간을 통해서 그것이 그냥 샘 솟듯 나오는 겁니다. 천주교의 묵상 생활, 피정의 집, 침묵 생활은 하나님과 영적 합일을 이룬다는 면에서 바람직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디는 몸무게 49kg밖에 안 됐다고 하는데, 그 육체를 가지고 대영제국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서방 기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소한 육체를 가지고 어떻게 이 시대에 그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대영제국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까?” 그는 “내가 이길 수 있는 힘은 월요일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월요일은 침묵의 날이랍니다. 그날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싸우고 있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인가?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인가? 우리 조국에 있어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의 동포에게는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하루 일과를 마치시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이면 산으로 가셨다고 하였는데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타고르는 간디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마하트마 간디’라고 명칭을 붙여서 보냈습니다. 마하트마라는 것은 ‘Great soul’이라는 말입니다. 초인이라는 뜻입니다. 체구는 왜소한데 그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은 초인적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몸은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릇이 크든 작든 그 속에 어떤 정신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소한 체구였지만 그 속에 초인적인 정신을 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약점은 묵상의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묵상을 해야 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 영혼의 그윽히 깊은 곳에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오는 것을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 세속의 소리만 듣습니다. 세속의 소리는 잡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나는 겁니다. TV 뉴스 듣고 신문을 보면 신경질이 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속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생각이 없는 시대입니다. 육신만 부각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래서 묵상의 생활, 여기서 영성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2) 관심
관심은 목적한 바를 찾게 해주고, 발견하게 해주고, 얻게 해줍니다. 여러분, 영성이라는 것은 갈급해야 합니다. 사모해야 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목회를 너무 수단으로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법을 찾으러 나갑니다. 그래서 1980년대, 1990년대 있었던 각종 세미나는 앞에 꼭 붙어 있는 것이 교회 성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법과 수단을 가르쳤습니다. 목회 원칙을 무시하고 직접 수단과 방법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면서도 피곤하고 안 되는 겁니다. 방법을 너무 좇다보니 설교는 잘합니다. 그러데 감동이 없습니다. 영성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설교는 재미있는데 감동이 없고, 옛날 목사님들은 설교는 재미없었는데 감동이 있었습니다. 영성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이라는 것이 좌우하는데 현대 목회자들은 이 점에 굉장히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둑에 어떤 성자가 앉아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성자가 아무 소리도 안하고 물속으로 데리고 갑니다. 물속에 집어넣고 한참 동안 있습니다. 물속에서 부글부글하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도 한참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거의 기진할 때쯤 꺼내고는 그냥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이 내가 신을 만나는 방법을 물었지, 물에다 집어넣으랬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성자가 말합니다. “자네가 물속으로 들어가서 공기를 갈급한 만큼 신을 만나기를 사모해 봐라. 그러면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모함, 추구함입니다. 관심입니다. 영성은 그냥 오다가다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입니다.
(3) 고전
고전을 통해서 영성을 계발하게 됩니다. 웨슬리는 제레미 테일러가 쓴 「거룩한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탐독합니다. 그 책 속에서 순결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헌신을 다짐합니다. 고전을 통해서 주께 헌신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읽는 동안, ‘아! 나도 이렇게 살 거야. 나도 예수님의 삶을 모방해서 살고 싶다’고 헌신을 각오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부흥사였던 이용도라고 하는 감리교 목사님이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까지 됩니다. 1924년도에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이분이 폐병 3기에 신유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후에 성령을 받습니다. 은혜를 입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대부흥사로 활동을 합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고 겸비와 기도와 사랑을 배워 모방의 삶을 살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검은 고무신에 검은 동정이 달린 두루마기를 입고 부흥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고전을 통해서 경건의 힘을, 영성을 계발시킨 것입니다.
존 번연은 델트의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루터는 타울러의 설교집, 어거스틴은 아타나시우스의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읽고 경건의 길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이라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우리 영성의 문은 백지장 하나 차이 때문에 막히고 뚫립니다. 조금만 우리가 만지면 뻥 뚫려서 영적 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데 백지와 같은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에 이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 만질 수 있는것이 뭐냐 하면 산에 가는 것이고, 침묵하는 것이고, 고전을 통해서 관심을 갖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4) 쉼과 안식
우리 목회자들은 너무 바쁘고 분주하고 긴장하여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목회자들은 일주일에 한 10편 이상 설교를 합니다. 어느 날 일본에 목회자 세미나가 있어서 갔는데 일본 목회자들이 한국 목회자들의 삶을 듣고 나서 말을 못하고 웃더라고요. 왜 웃냐 하니까 기가 막혀서 웃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면서 사느냐고요. 거기다가 심방 있지, 설교와 철야 해야지, 정치도 해야지, 교회 성장 시켜야지……, 그러니까 탈진이 오고 고갈이 오고 영적 메마름이 오는 겁니다. 막 쓰기만 하고 쉬지 않으니까 부도 나는 겁니다.
외환 딜러들은 순간적인 결단에 의해서 수억, 수십억씩 왔다 갔다 합니다. 수십억을 벌 수도 있고 수십억을 잃을 수도 있으므로 항상 초긴장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루 일하면 하루는 꼭 쉬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틀 계속 못한답니다. 정신적인 부담 때문에. 어느 목사님은 은퇴하시는 날 은퇴사 가운데 한마디 말씀하셨는데 그 변이 인상 깊은 말이었습니다. “나는 쉬는 것이 최상의 목회임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한국의 목사들은 바쁘긴 바쁜데 방법이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피곤하고 일찍 망가지는 겁니다. 몸도 망가지고 영성도 망가지고 체력도 한계가 오는 겁니다.
그래서 쉼의 방법도 많습니다. 하나는 취미 생활입니다. 목회자들은 대부분 취미가 없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취미가 없는 것도 은혜입니다. 취미가 너무 강하면 목회가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낚시에 취미가 너무 강해서 수요일 오는 것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쉼으로써의 취미 생활인 운동, 낚시, 등산, 독서 등은 참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순교지 방문입니다. 거기 가면 영감이 팡팡 쏟아집니다. 가 보십시오. 새남터, 제암리, 병촌리 같은 데 가보면 느낌이 다를 겁니다. 한 가족, 11명이 순교당한 집이 있는데 그때 용케 살아남은 사람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안방에 죽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마루에 죽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마당에 죽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부엌에 죽어 있었습니다. 내 동생은 문 밖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모두 쇠고랑과 곡괭이에 맞아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이 글만 읽으면 저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설교를 하게 될 겁니다.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분출되어 올라오는 영감의 폭발을 경험하게 됩니다.
유관순의 생가, 김대건의 생가 거기서도 생각이 달라집니다. 유적지를 다녀오는 것도 좋습니다. 윤봉길, 이순신, 세종대왕의 숨결이 있는 곳, 역사의 숨결이 있는 곳, 거기 가면 큰 뜻이, 생각의 문이 열릴 겁니다. 틀이 깨어집니다.
성지 순례나 기행 여행 역시 중요합니다. 발자취를 따라서 역사의 변화를 보는 즐거움과 감격이 있습니다. 설교의 변화, 생각의 폭, 생각이 정리되는 그런 기회를 맛보게 됩니다.
(5) 단순한 삶
생활이 단순해지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너나없이 복잡합니다. 생각도 마음도 참 복잡합니다. 단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맑아집니다. 생각과 정신이 맑아집니다. 목회도 단순하면 더 성장합니다. 목회자가 너무 부지런한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 부지런하면 교회 안에 자꾸 법을 만듭니다. 저는 세상에 법이 없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법이 많아지면 목회자를 옭아매는 올무가 됩니다. 소위 행정력 있다는 분들이 이것을 못 버립니다. 교회에 제도를 자꾸 만들어요. 예산을 세울 때도 자꾸 항목을 분리시키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서툰 목회입니다. 예산 항목은 대여섯 개만 있어도 됩니다. 그래야 지출하기도 좋고 걸리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설교 역시 잘하려고 하는 것이 탈입니다. 잘하려고 하면 복잡해집니다. 신학대학 교수님 모시고 설교하면 복잡해집니다. 단순할수록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 핏대 세우지 말고 고함치지 마십시오. 주일에 한꺼번에 25분, 30분 수십 가지를 먹이니까 배탈나는 겁니다. 그것 교회 문 나가기 전에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두어 개만 넣어줄 생각하고 나머지는 잊게 해주십시오. 목회자들은 신자들의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직장에서 부대끼고 살았는데, 주일에 해소하려고 왔는데 오히려 힘들어한다면 교회에 안 옵니다. 열 가지 모두 아프게만 하면 신자들은 살아가지 못합니다.
설교 잘하려고 하는 것이 병입니다. 단순하고 심플하게 하십시오. 성경을 읽지도 않는데 어찌 다 알겠습니까. 생활은 단순해야 합니다. 야구 선수가 홈런 칠 때는 단순하게 칠 때 홈런이 나옵니다. 양 어깨에 힘 바짝 주고 치면 에러가 나옵니다. 골프 칠 때, 야구할 때 있는 힘을 모아서 부드럽게 템포에 맞게 칠 때 공이 펜스를 넘어가는 것이지, 힘을 주면 가다가 떨어집니다. 가다가 돌아가고, 그래서 해설자가 “저 선수가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심플하게 하십시오. 교회 성장에 온 힘을 쏟고 집중하니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면 상대편 마음도 불편합니다. 그래서 부교역자들이 힘이 드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목회도 설교도 단순한 삶에 맞추면 됩니다. 그러면 편안합니다. 내가 자연스러우면 상대편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자연스러워집니다.
4. 영성을 소멸시키는 요인들
영성을 세우고 깊이를 만들었는데 이런 영성을 빨리 잊어버리게 하고 소멸시키게 하는 요소들도 생활 속에 참 많이 있습니다.
(1) 나태함
초대 교회 교부들이 범했던 가장 큰 죄가 게으름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게으름을 ‘대낮의 악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목회자가 시간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시간이 너무 많으면 무료해집니다. 그래서 낮잠을 많이 잡니다. 이것이 영성을 병들게 하고 고갈시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양을 치는 곳에 거기에 반드시 염소 한 마리씩 넣습니다. 양들은 잠자기를 좋아합니다. 잠자는 데 누가 와서 자기 위를 누르면 그대로 있어요. 또 와서 누르면 그대로 있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양들의 생존을 위해서 염소를 집어넣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목회하는 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할 일은 없고 심방해 봤자, 봄 심방 해도 일주일이면 끝나고 환자 심방을 가도 가끔 가야지, 매일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나태함, 이것은 도전 의식도 상실시키고 또 추구하려고 하는 마음도 상실시킵니다.
(2) 조급함
교회 성장에 대해서 조급함을 가지면 부교역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달달 볶아요. 또한 가정도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 조급함은 정서와 영성 생활의 안정을 심하게 해칩니다.
(3) 명예욕
명예를 추구하다 보면 경쟁이 생기고, 경쟁이 생기다 보면 공격이 나오고 영성이 고갈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마음의 평화를 깨는 5가지 원인을 말했는데 ① 복수심 ② 지나친 욕망 ③ 질투심 ④ 마음의 분노 ⑤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이 마음의 평정만 깨는 것이 아니고 사뭇 평정을 혼란시킵니다. 그래서 설교가 안 됩니다. 설교자들은 마음이 정돈되고 맑고 편안해야 설교 준비가 잘됩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도 혼란이 없어야 쫙 나가는데 설교하다 눈이 딱 마주치면 순간적으로 리듬이 깨집니다. 그러면 혼란이 옵니다. 이것이 영성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이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조각가들이 돌을 가져다놓고 처음부터 깹니까? 어느 상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립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큰 돌을 갖다놓고 그 앞을 오랜 시간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상이 떠오를 때까지. 한참을 앉아 있는데 모세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하고 필요없는 돌만 쪼아내니까 모세상이 완성되었습니다. 상이 떠올라야 설교도 하고, 은혜도 끼칠 수가 있습니다.
(4) 불화와 갈등
목회자들이 갈등을 겪을 때 최악의 상태입니다. 적개심을 품게 되고 편을 가르게 되고 분노를 일으키게 됩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이 불화는 목회의 암적 요소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평정과 영적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5) 소유욕
어반 홈즈는 “물질에 관심이 커진다는 느낌을 받는 그때부터 영성은 마르기 시작한다”고 말했고, 윌리엄은 “자아를 물질에 투자하게 되면 영은 질식당하게 되어 영성이 그 사람의 삶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목회자들에게 물질의 복을 안 주셨습니다. 목회자들은 물질을 추구하게 되면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물질이 많으면 목회가 잘 안 됩니다. 그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6) 분주함
목회자의 분주한 생활은 영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잦은 부흥회, 총회, 조찬, 정치 등으로 매일 밖으로 나가는 목회자가 영성이 충만할 리가 없습니다. 목회자의 영성 생활은 노력과 수고와 생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5. 결론
정치 이념 가운데 명군 개념이 있습니다. 명군은 제도를 고치고 개혁합니다. 이성계, 박정희 같은 사람. 그런데 명군보다 한 단계 성숙한 정치 이념이 성군입니다. 성군은 업적, 개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군은 할 일이 없습니다. 성군일수록 그 나라에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이 누구지?’ 할 정도로 하는 일도 없고 개혁도 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없습니다. 도둑도 없고 경제는 잘됩니다. 나라가 풍성합니다. 이것이 성군입니다.
목회를 요란스럽게 하는 사람은 이름은 나지만 성공하지를 못합니다. 누가 성공합니까? “그분은 뭐하고 살아?” 하는 것처럼 아무 특징도 없고 하는 일도 없습니다. 막 교회를 뜯어고치고 요란하지 않는데 소리없이 부흥합니다. 조용하게 설교하고 조용하게 산에 가고 조용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플러스해서 소리없이 부흥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목회자입니다. 총회장과 상관 없습니다. 조용한데, 사람들이 보기에는 2% 부족하다 싶은데 목회는 소리없이 합니다. 이것이 성군 스타일입니다.
여러분, 영감에 대해 아무리 얘기해도 성령이 나와 함께하심이 없으면 영감도 소용없습니다. 소 한 마리가 짐을 끌 수 있는 무게가 4톤이랍니다. 2마리면 8톤인데 그런데 실제로 했더니 12톤이랍니다. 연합입니다. 연합하면 아주 힘이 강해집니다. 그러니까 오늘 목회자들이 고달프고 힘들고 갈증나고 허기지고 지치는 것은 방법 가지고 혼자 해서 그럽니다. 목회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는 아는데 방법에 치우치다 보니, 주님은 배제하고 나 혼자 하니 지치는 겁니다. 힘은 들어가는데 효과는 없습니다. 그때 주님과 연합을 하면 내 능력의 몇 배가 주어지는 힘, 그것이 영성의 힘입니다. 이 힘 가지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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