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Seminar

[한신별세세미나-19차]_영성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재가 수도사적 영성:정성진목사)

샬렘하우스주방장 2013. 8. 9. 16:57

 

재가 수도사적 영성

 

 

 

정성진 목사 (일산 광성교회)

 

 

재가 수도사라고 하는 이 말은 개신교에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이름입니다. 제가 이 말을 쓰게 된 배경은 신학교를 졸업할 때 논문을 썼는데 수도원에 대해서 썼습니다. 저는 역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민중신학을 하고 데모하는 써클을 만들어서 교회사 분과장을 맡아 역사 공부, 교회사 공부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때 수도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읽은 천주교 서적에 재가 수도사라는 말이 나온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천주교에서는 집에서 신부들과 비슷하게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재가 수도사라 말하고 불교에서는 재가 불자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 영성 자체는 이것이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 집에서 수도하는 수도사여야 하는 신학임에도 불구하고 재가 수도사라고 하는 말이 낯선 단어가 되어버렸고 자신이 수도사요, 수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제게 있습니다.

목회자가 되었다는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 수도자가 된 것을 말합니다. 목사나 신부나 스님이나 다를 바가 없는 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생활을 등한시한다거나 수도 정진의 정도가 덜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정을 꾸리면서 수도하는 것만큼 어려운 점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훨씬 더 고등하고 고상한 수도사가 되려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 기독교에서 수도생활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수도원에 들어가고 집을 떠나고 기도원에 가고 하는 것만이 수도사적인 영성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집에서, 목회의 현장에서, 시장에서, 일터에서 있을 때 수도의 향기가 난다고 하면 아름다운 일이고, 그것만큼 복음의 효과적인 방편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껍데기 종교가 될 위험성을 우리는 안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꾸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성장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성장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뒷받침이 없이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성장에 대비하지 못했고,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목사는 생활이 고급화됩니다. 차가 대형으로 또는 중형차로 바뀌게 됩니다. 큰 교회 목사와 작은 교회 목사가 똑같이 살아야 된다고 하는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르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주장은 저는 근본적으로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 목사가 아주 부유하게 살고 작은 교회는 아주 찢어지게 가난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한다면 교회와 기업이 다른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잘 살기 위해 성장시킨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예비군 향목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골 담임 목사 할 때 예비군을 모아놓고 질문하고 답변하는 식의 대화를 많이 해보았는데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목사는 사장이요, 장로는 이사라고 하는 생각을 누구나 다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일정하게 우리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 중에서도 성공회와 구세군 같은 교단들은 일정한 규율과 엄격하게 봉급의 체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목사들간의, 신부들간의 생활의 편차가 작은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단들은 세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심각성을 느끼고 목회자 생활비 평준화 문제를 저희 교단에서 시도하고 있는 자체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목사들에게 제일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이 돈의 문제입니다. 목회학에서 여자의 문제와 돈 문제를 주의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여자 목회자가 많아지니까 남자의 문제도 포함되어서 이성의 문제라고 합시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를 가시든지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사역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요,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1. 탁부(濁富)

 

여기서 은 흐릴 탁(濁)자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된 사람을 탁부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도둑놈이다 그렇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부자를 탁부로 보는 눈입니다. 세상에는 일확천금, 불로소득의 허황된 꿈을 꾸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 되면 복권이든 지식이든 술 장사든 범죄든 가리지 않고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벼락이라도 맞아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번은 감사헌금 봉투가 올라왔는데 하나님! 돈벼락이라도 맞아보고 싶습니다라고 적힌 감사헌금 봉투가 올라온 것을 보고 제가 기절을 했습니다. 그분이 IMF 시절에 인테리어업을 하다가 망해서 일어나지를 못해서 너무 어렵게 사는데 신앙을 그때 가지셨던 분입니다. 돈 벼락이라도 맞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벼락이라고 하는 것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우리 집에 들어오는 전기가 몇 볼트인지 아십니까? 220볼트, 거기에 감전돼도 굉장히 짜릿합니다. 그런데 벼락은 30만 볼트입니다. 완전히 잿덩어리가 되고 새까맣게 타버리는 겁니다. 그래도 맞겠다고 하면 말리지 않겠지만 우리 목회자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깨우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많은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인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문제는 돈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복채가 아니므로 사랑하면 안 됩니다. 미혹을 받고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말 것입니다.

2. 청부(淸富)

 

청부란 돈을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 부자가 된 사람을 말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이 쓰시는 글을 보면 깨끗한 부자, 늘 청부론을 말합니다. 이에 더 나아가서 사용하는 데까지도 정당할 때 진정한 청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욥이 청부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우리나라 역사에서 청부를 꼽으라고 한다면 12대 300년을 만석꾼으로 내려온 경주의 최부잣집을 들 수가 있습니다. 부자가 3대 가는 법이 없다고 그랬는데 그 가문은 300년 동안 부자였습니다. 저도 할아버지, 아버지 때는 굉장한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경기도 안산시가 고향인데 옛날 군자면이라고 하는 양조장 집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양조장 집 하면 군에서 1~2위 재력을 다투는 집입니다. 엄청난 부잣집에서 태어났는데 저는 아버지로부터는 땅 한 평도 유산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부자가 3대를 가지 못한다는 말이 얼마나 실감나는지 모릅니다. 저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로 만들려고 양조장에서 나온 돈으로 살아가게 하지 않으시고 이미 제가 태어날쯤에 둘째 아들이셨던 아버지가 받으셨던 재산을 몽땅 날려서 저로 하여금 양조장에서 나온 돈으로 먹지 않게 하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주신 양식으로 먹이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경주 최 부잣집은 우리가 여섯 가지 눈여겨 보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과거를 보는 것은 정말 네가 공부를 하였느냐, 실력이 있느냐 그것을 보는 것은 좋다. 권력이냐 돈이냐 둘 중에 하나만 채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입니다.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마라-이 사람들이 만석 이상이 되려고 할 때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세경을 낮추어 주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경주 지방에서 최부잣집이 땅을 사면 살수록 주변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기뻐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네들이 낼 세가 줄어드니까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만 석이 넘지 말라는 가훈에 따라서 만 석을 넘기지 않으려고 땅을 사면서도 세를 줄여 나갔습니다. 그러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들이 부자가 되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찾아오는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항상 기본적으로 이 집에 100명은 머물러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넷째,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흉년에는 꾸어줄 망정 땅을 사지 않았습니다. 도를 넘지 않았다 그런 말입니다.

다섯째, 최씨 가문의 며느리는 시집 와서 3년 동안 비단옷을 입지 말고 무명 옷을 입어라-그래서 이들은 검소하게 집안을 관리했던 것입니다.

여섯째, 사방 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그래서 지난 과거 300년 우리나라에 가장 변화가 무쌍했던 시절 전란과 변란과 기근과 지진, 온갖 난리와 흉악한 무도들이 일어났을 때, 동학난이 일어났을 때도 지나가는 모든 도적의 무리나 난리에도 경주 최부잣집은 한번도 건드리고 지나간 무리들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인정받고 존경받았으면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그래서 전형적인 부자 가문이 경주 최 부잣집이었다고 전해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자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3. 성빈(聖貧)

 

오늘 제가 수도사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청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성빈에까지 나아갈 때 수도사적 영성을 이루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성빈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빈이란 자기 소유를 나누어 주고 가난을 자처하는 것으로 자발적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성빈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인도하신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 자신의 모든 소유를 아낌없이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근에 맨발의 천사 최춘선 목사님에 대한 책과 동영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가지고 동영상도 편집하고 설교의 내용을 꾸며 가지고 교인들에게 설교를 했는데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먼저 이것을 읽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이것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몇천 억도 넘는, 지금으로 말하면 수조 원도 넘을 수 있는 땅을 무상으로 다 나누어 주고 30년 동안 조국 통일의 소원을 맨발에 담고 걸으며 복음을 전했던 아주 귀한 천사와 같은 성빈의 길을 걸었던 분이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 1182~1226)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방탕한 청년이었던 그는 중병에 걸려 앓다가 환상 중에 계시를 받고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에 미친 프란체스코의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역사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주교를 큰 성으로 비유하며 그 성이 무너져 가고 있을 때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성벽이 다 무너진다고 말하는데 묘하게 버티고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성벽 밑에 초가집이 한 채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초가집의 기둥이 성벽을 떠받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초가집은 바로 프란체스코였습니다. 중세의 사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코의 영성이 중세기 천주교의 타락을 막아내었다. 

성경을 보면 여리고의 세무서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드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여러분, 이렇게 주고 삭개오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삭개오는 예수 믿고 완전히 망한 사람입니다. 깡통 찬 사람입니다. 절반은 쪼개서 누구를 주었습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절반은 무엇을 하는데 썼습니까?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토색했다는 것은 등쳐먹은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세무서장의 주특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세금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차압 붙이고 그들의 재산을 해먹는 게 바로 세무서장이 한 일 아니었겠습니까? 바로 그는 예수 잘 만나서 쪽박 찬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는 보배 예수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과 자기 재산을 바꾼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영적인 교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빈이란 자기가 보배롭게 여기는 것을 다 내어주고 예수님과 바꾸는 영적인 교환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도자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도를 닦아야 합니다. 무엇을 얻고 구하고 채우는 것은 저급한 단계의 신앙입니다. 한국 교회에 재가 수도사적 영성의 바람이 불어 고상하고 아름다운 성빈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법정 스님만 텅 빈 충만을 이야기하고 불가에서만 무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기독교가 무소유를 말하고 텅 빈 충만을 말할 때가 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보너스가 없습니다. 보너스에 대한 정의를 제가 이렇게 내렸습니다. 보너스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기업의 이윤을 종업원과 나누는 것을 보너스라고 한다.

교회가 기업입니까? 아닙니까? 왜 확신이 없습니까?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교회가 기업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보너스가 있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본봉 올리면 되지. 여러분 그렇게 피해 나갈 구멍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몸을 던지고 별세 목회를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장에 불이 붙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보너스를 받지 않는 이유는 교회는 자본주의도 아니고 더욱이 기업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고 당부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냉장고에 많이 쌓아 놓고 사는 사람이 부자입니까? 아니면 매일매일 신선한 고기와 신선한 야채와 신선한 쌀이 도정된 것이 들어오는 것이 부자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가 확실합니까? 왜 너희들은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내가 너희들에게 구하면 주겠다고 했는데 염려하고 걱정하고 큰 냉장고 갖다가 쌓아 놓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대로 돌아가서 말씀대로 전하고 살아보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살려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믿음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즐기고 해보면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즐기고 기쁘게 해보면 때깔이 좋아집니다.

저희 교회는 지금 건축 중에 있습니다. 건축이 몇 %로 공정해 왔느냐 하면 90%를 넘겼습니다. 오늘 마당에 포장공사를 하고 있는데, 교회 건축을 하면 목사가 병들든지 쫓겨나든지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보통 이것이 한국 교회의 아주 안 좋은 병폐입니다. 목회자들의 고난의 십자가가 건축이 아닙니까? 그런데 저희 교회도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교인들이 많이 모임으로 공간이 많이 협소해서 짓다가 보니까 평수가 넓어졌습니다. 그래서 빚이 많습니다. 공개하면 여러분들이 쇼크를 받을 것 같아서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 얼굴이 누렇게 뜬 것 같습니까? 괜찮습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안 되면 누구 망신입니까? 아버지 망신입니다. 목사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까 교인들도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입니다. 기쁨이 전염됩니다. 염려, 근심, 걱정도 전염되지만 우리의 사랑과 기쁨도 전염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주 기쁘고 즐겁게 합니다.

아무 문제 없이 건축을 90% 이상 공정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문제는 이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받지만, 교회는 지어졌는데 내가 못하고 가면 누군가 와서 목회하겠지 하고 마음을 비우니까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들 마음을 비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까지 교회 관리인을 따로 두고 있지 않습니다. 목사들이 화장실을 청소하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 고민 중에 하나가 지금 지은 교회는 관리인을 두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규모가 커졌습니다. 땅이 3,600평에 건평이 4,000평 됩니다. 큰 교회를 짓기 때문에 그 교회가 절반은 사회와 같이 쓸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공연장, 체육관, 헬스클럽, 미장원, 무료약국, 빵집, 카페, 도서관, 생협, 아름다운 가게, 대안학교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많은 시설을 집어넣어서 커졌습니다. 그런 걸 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통하여 교회에 들어가는 돈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선교와 구제에 드릴 수 있을까 그런 방향으로 모든 것을 모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교역자들을 모실 때 꼭 두 가지를 묻습니다. 첫째, 보너스 없이 살 수 있겠느냐? 둘째, 화장실 청소 할 수 있느냐?

저희 교회 절반의 교역자는 서로 교단이 다릅니다. 저희 교회가 8년 만에 다섯 명을 파송했는데 우리 교단 목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합동측에서 나이가 지나서 파송해 주지 않는 분은 1호로 보냈고, 2호는 침례교회 목사님, 사람이 괜찮으셔서 우리 교회에서 안식년 1년을 지내시는데 좋으십니다. 훌륭하신 목사님이라서 필리핀에 보내드리고 세 번째는 집사님 부부가 선교한다고 해서 심양 서탑교회 지휘자로 보내서 3년간 잘 지내시고 미국 캐나다에 어학연수 가셨습니다. 네 번째 선교사는 우리 교단 목사님이 했고, 다섯 번째 선교사는 평신도 집사, 권사를 필리핀에 파송했습니다. 교역자도 순복음도 있고 교단이 여럿 섞여 있습니다.

우리 교회 식당에 오면 여러분도 다 그렇게 하시겠지만 첫주에는 목사가 설거지를 합니다. 500명 식사하고 나면 적게 해도 한 40분 정도 설거지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장로님들이 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안수집사님들이 하십니다. 그 다음부터는 1남선교회부터 11남선교회까지 돌아가면서 서빙하면서 설거지 합니다. 그런 것이 이제는 완전히 정착되어 섬기는 분위기가 잘 이루어져 있습니다.

옛적에 예수원에 갔을 때 이런 구호를 보았습니다. 노동은 기도입니다. 속세를 떠나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수도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현장인 교회와 가정 그리고 일터에서 수도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재가 수도사적인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성으로 무장한다면 총회장 한다고 돈 가지고 선거한다든지 노회장과 총대 자리를 얻기 위하여 정력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너무 개탄합니다. 저도 부총회장 선거할 때에 사무를 봤던 사람입니다. 호텔에서 두 달간 머물며 일했던 경력이 있습니다. 제가 뭘 모르겠습니까? 교계의 뒤안길과 세상의 뒤안길을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16대 총선에는 고양시 공명선거를 위해 공선협 대표로 부정선거 감시운동도 했습니다. 현재는 고양시에 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를 하고 공동대표로 2선에 물러났습니다. 러브호텔 문제로 고양시가 유명했을 때 시장 낙선 운동을 해서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영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어야 됩니다. 적어도 일산에서는 광성교회가 좋은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지역사회를 위해서 아무 조건 없이 선교하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문화강좌를 한 기에 500명씩 무료로 가르치는데 20기를 진행했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기도하고 예배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전혀 선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문턱이 낮아져서 마음대로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듭니다. 도서관을 합니다. 무료로 책을 대여합니다. 빌려가서 떼먹어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모든 봉사를 다 알리지 않습니다. 고양시에 청소년 회관이 없을 때, 우리는 개척해서 얼마 안 되는 교회였지만 9억 원을 들여서 한달 3,000명이 이용하는 청소년 회관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고양시에 큰 청소년 회관이 생겨서 이용률이 떨어졌고, 우리는 또 다른 데로 이사 가게 돼서 체육관도 만들고 공연장도 만들고 운동장에는 미니축구장도 만들고 많은 지역 사람들이 와서 쉬고 운동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영성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영성을 갖자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명예를 탐하도록 목사의 거룩한 지위를 주신 것이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수도사적인 자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상 사람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공금을 부정하게 횡령한다든지 이성의 문제를 일으킨다든지 명예를 위해 추태를 부린다든지 교회를 세습한다든지 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자행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의 모든 내규를 한국 교회가 기대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 다 고쳤습니다. 어떻게 고쳤느냐 하면 목사는 65세에 은퇴하고 6년마다 신임투표를 받습니다. 우리가 3년반 만에 그 법을 제정했기 때문에 내년 6월에 저는 신임투표를 받습니다. 그리고 원로목사가 되지 않고 그냥 65세가 되면 교회를 떠납니다. 아무 조건 없이 퇴직금 받고 떠나는 것으로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 노후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너무 과도한 걱정 때문에 마지막 은퇴의 노후가 비참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들 하루하루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런 목회를 어떻게 하랴 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주님이 주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은퇴 후에도 먹이고 입히고 살려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수도사라고 하는 것은 채움의 영성이 아니라 비움의 영성을 의미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7,500명으로 채워진 성도 중 초기에는 내가 나가서 몇 명 전도했지만 그 후에 내가 나가서 전도해서 왔습니까? 다 하나님께서 공짜로 보내 주셔서 왔습니다. 교인들이 전도했습니다.

저는 작은 개척교회들을 생각하면서 개척할 때 전단을 한번 뿌린 이후에는 한 번도 전단을 뿌려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공정거래법에 위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다고 막 전단을 뿌려대고 가난한 교회, 작은 교회는 돈이 없어 그것도 못하고 그렇게 돼서야 우리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런 정신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한다면 작고 크고를 떠나서 분명히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고 우리 삶이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목회의 현장으로 바뀌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길이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한 길이요, 사도가 실천한 길이요, 중세 수도사들이 걸어간 길이며, 지금도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모하며 걷는 길입니다. 이 길은 좁은 길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선뜻 나서는 이가 없습니다. 걷는 이가 적으니 모범을 보이는 이가 적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면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 모두 이 길을 걸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진정한 행복이 이 길에 있습니다. 이 길이 목회자가 승리할 수 있는 길, 예수님을 따라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