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Seminar

[한신별세세미나-19차]_영성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별세신학의 영성과 목회(1): 이윤재목사)

샬렘하우스주방장 2013. 8. 9. 16:59

 

별세신학의 영성과 목회(1)

 

 

 

이윤재 목사 (별세목회연구원장)

 

 

서론

 

평생 별세의 복음을 외친 이중표 목사,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그가 죽음 앞에서 보여준 별세에 대한 진지한 고백이 평생 그가 주창해 온 별세신앙의 핵심임을 발견합니다. 그가 죽음의 병상에서 쓴 「죽어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에서 그는 그 앞에 닥쳐오는 죽음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불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의 결과로만 받아들인다.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사단의 사자요, 죽음을 지배하는 것은 악의 세력이라고 여긴다.……그러나 이제 죽음도 감사하다. 오래 산다는 게 반드시 좋은 것일 수만은 없다. 편안한 날을 얼마 더 산다 한들 더 좋을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를 데려가시는 그 순간이 가장 적당한 때인 것이다. 그러니 죽음도 행복인 것이며, 죽음 앞에서 감사를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죽음은 결코 불행한 것만이 아니다. 죽음의 최종적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 프랜시스가 죽음을 자매처럼 맞아들인 것같이, 나도 죽음을 친구로 맞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했다……. 별세는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요, 뒤돌아보지 않고 죽는 것이다. 그냥 담담히 수술에 임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진행하실 것이었다. 육신의 생명이 죽는 순간 사역에 대한 집착도 끝나야지, 그렇지 못하다면 죽고도 죽지를 못하는 것이다. 담관암이라는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수술 앞에서 나는 별세신앙의 진리를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

결론은 죽음이 꼭 죽음인 것은 아니며 도리어 생명일 수 있고 살림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면 죽음이란 부활 생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절차요 관문일 따름이다……. 죽음이 곧 삶이라는 역설이다. 죽는다고 다 죽는 것이 아니요, 죽어서 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으로 죽는다. 그러나 죽어서 사는 사람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별세의 사람이다.1)

 

이중표 목사는 그가 평생 외쳐온 별세의 신앙대로 갔습니다. 가끔 그가 주장하는 것과 그의 마지막 죽음이 다른 사람이 있지만 이중표 목사는 일관되게 별세신앙을 주장하다 일관되게 그 고백대로 하나님께 갔습니다. 도대체 별세신앙이 무엇이기에 한 사람을 이렇게 위대하게 만듭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나 죽으나 예수님께 매이게 했으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만들었습니까? 일찍이 죽음 앞에서 이렇게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죽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신학을 말할 수 있지만 그 신학이 죽음 앞까지 감동을 준 신학은 많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많은 말장난이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유달리 강한 신학이 있습니다. 그것이 별세신학입니다. 이중표 목사 자신의 죽음으로 그 효능과 진지성이 입증된 별세신학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탐구의 시작으로 이중표 목사의 별세신앙을 영성과 목회의 눈으로 살피고자 합니다. 이것은 아마 그것이 가지고 있는 큰 그림의 지극히 작은 밑그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저는 믿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의 연구와 노력에 의해 그 보화가 드러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쓰는 영성 혹은 영성신학에는 많은 정의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정의든지 우리 삶에 체험되고 실천되지 않는 영성 혹은 영성신학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요즘 너도나도 영성을 말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이해에 따라 영성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최근 기독교계의 영성신학 접근은 교리보다는 사람을 그리고 추상적 개념보다는 인간의 삶의 실존적 고백을 강조하는 추세로 나가고 있습니다. 영성학자 쉘드레이크는 이것을 세속적이며 대화적인 접근 방식(secular dialogic approach)라고 불렀습니다. 세속적이란 영성이 우리의 일상의 삶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고, 대화적이란 영성이 우리의 삶의 체험과 동시적으로 관련을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2)

영성이 다만 우리의 삶을 초월한 어떤 형이상학적 명제로 말해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신학의 상아탑 속에 갇힌 죽은 언어가 아니라 역사 속에 경험된 체험과 변화로부터 고백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삶 속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한 인격적인 고백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별세는 훌륭한 영성신학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신학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았고 한 인격 안에 체험된 별세의 사건으로부터 말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별세는 신앙적 삶의 현장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그 경험은 인격 하나하나에게는 독특하지만 모든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세는 처음부터 소위 서구 신학의 이분법적인 영성신학의 이름으로 말해지지 않았습니다.

12세기부터 시작된 소위 서구 신학의 영성은 분리와 나눔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영성을 신학에서 나누고 사랑을 지식에서 나누고 영성을 사회적 실천과 예전으로부터 나누었습니다. 그야말로 영성은 명사가 되고 철학이 되고 전문가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그것의 한 첨예한 형태가 중세 수도원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별세는 세상 안에서 신자가 경험할 수 있는 성서적 체험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사람을 그 은혜의 체험에 초청하는 보편적 영성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의 케리그마에 근거를 둔 성서의 중심 메시지를 통과하여 2천년 기독교 영성의 중심주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이중표 목사의 별세를 영성신학적 관점에서 살피고 더 많은 사람들을 별세의 영성으로 초청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3) 연구는 이중표 목사의 문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4)

 

1. 별세와 영성

 

 

(1) 별세의 태동

 

별세는 신학자의 책상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중표 목사의 구체적인 신앙적, 목회적 삶의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크게 네 단계의 삶의 체험을 통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단계는 어릴 때의 성장 과정입니다. 이중표 목사에게 별세는 그 부모에게서 받은 영향이 큽니다. 아버지는 한 많은 세상을 시름으로 살면서 어린 시절 그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 상처는 치유와 용서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계기가 됩니다. 살림꾼이었던 어머니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품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했습니다. 부모는 그에게 별세의 신비와 은혜를 알게 한 고마운 분들이었습니다. 이중표 목사는 그 부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때문에 제가 별세의 신비를 누리게 되었다면 어머니는 제게 별세의 목회를 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도와주신 분입니다.(매일, p. 88.)

 

별세의 신비와 목회는 그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부모의 인격과 함께 그의 어린 시절의 다양한 경험은 별세의 태동에 작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로서의 삶,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간 어린 시절의 폐결핵, 그로 인한 자살 기도, 계속된 가난과 질병, 이런 것들이 그를 별세의 사람으로 빚어가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이었습니다.5)

둘째 단계는 그의 신학교 경험입니다. 신학교에서 그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관심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직접 배우는 공부였습니다. 사람에게 점수 따는 것보다 하나님께 점수 따는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신학 서적을 암기하는 것보다 호젓한 밤, 삼양동과 수유리 사이를 걸으면서 주 없이 살 수 없네를 부르는 것이 그에게 더 큰 은혜요 공부였습니다. 진정한 신학 공부란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예수의 멍에를 메고 십자가를 지면서 배우는 공부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중표 목사가 별세에 눈뜰 때는 그때였습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것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고 예수로 사는 것이구나. 신학교에서 아무리 많이 배워도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고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참공부가 될 수 없다(매일, pp. 58-59.)는 것을 그는 그때 깨달은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초기 목회 경험입니다. 고부, 옥구, 관악으로 이어진 그의 목회 경험은 그로 하여금 목회자의 성공주의와 그리스도의 자기 부정 사이에서 많은 갈등과 고뇌를 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고뇌가 기도로 승화되었을 때 그는 별세 체험에 이르게 됩니다. 고부에서의 고난주간 환상 체험, 농민들과 함께 일하다 온몸을 분뇨로 뒤집어 쓴 배설물 체험, 성전 바닥에 흘린 성도의 눈물을 보고 목을 놓아 울었던 눈물병 체험, 관악교회에서 쫓겨나고 청계산에서 6개월 동안 거적때기 위에서 생활했던 실패의 체험 등이 그 예입니다. 이 체험들을 통하여 그는 목회자의 자기 죽음이 목회자의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목회자에게 성공은 어쩌면 자기 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신 것은 그의 의가 산산이 부서지고 떨리는 심정으로 신발 벗고 떨기나무 앞에 설 때였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결코 살 수 없는 것입니다(의식, pp. 23-24.). 이것을 그가 깨달은 것입니다.

넷째 단계는 한신교회 목회 경험입니다. 이중표 목사의 목회 과정에서 한신교회는 그의 목회의 성숙기에 해당합니다. 그것이 성숙기인 이유는 교회 성장도 이루었지만 별세의 구도자로서 그의 인격과 사상도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별세를 성서적 신앙으로 확신시킨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이 말씀은 그가 1988년 봄, 세 번째 수술 받을 때 감동적으로 깨달았습니다. 퇴원을 하고 설교 준비를 위하여 강단에 엎드렸는데 이 말씀이 감동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가 평소에도 읽고 외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 말씀은 예리한 칼처럼 그의 혼과 영혼을 찔렀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서 자기 죽음을 선언한 것처럼 자신도 십자가에서 자기의 죽음을 선언한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감동은 그가 수술 후에 죽음의 공포로부터 놓임받은 기쁨과 맞물렸기 때문에 더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죽음의 선언과 그로 인해 오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은 그 후의 그의 인격과 목회를 변화시켰습니다. 그후 그의 말입니다.

 

그때부터 교인들이 사랑스럽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을 책망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안타까운 마음과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누가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느냐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시시한 것들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입만 열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성경만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매일, pp. 67-68.)

 

확실히 이중표 목사의 별세는 1987~1988년 사이에 부쩍 성숙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목회학 박사논문으로 성서의 케리그마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던 것과 맥을 같이할 것입니다. 교회성장과 케리그마 설교란 제목으로 출판된 이 논문은 성서 전체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눈으로 보며 그것을 본질적인 메시지로 삼아야 할 것을 강조한 논문입니다. 이 연구가 분명 별세의 성서적 근거와 확신을 그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본문으로 한 최초의 설교가 1987년에 나오고 박사논문은 1997~1998년에 완성되었는데 최초의 별세를 주제로 한 설교 엿새 후의 은혜는 1988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6)

케리그마는 그에게 별세 이전 설교의 단골 메뉴였고 따라서 별세신학의 자연스러운 논리적 교량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케리그마가 성서의 중심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보는 것이라면 별세는 신앙의 중심 사건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죽음과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케리그마가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적이고 객관적 측면에 대한 인식이라면 별세는 그리스도 사건의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측면에 대한 인식입니다. 케리그마가 거기 그때(there & then)의 그리스도의 사건을 다룬 것이라면 별세는 여기 지금(here & now)의 나의 사건을 다룬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깊은 함수관계가 있습니다. 이중표 목사의 별세를 케리그마와 상관없이 볼 때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별세에서 만일 케리그마를 제외한다면 이중표 목사의 별세적 영성이란 실존적 신앙 체험이거나 혹은 주관적 신앙 체험 정도로 전락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만 실존적 체험주의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강한 케리그마적 근거 때문입니다.7)

별세가 영성적 체험에서 시작되었지만 체험주의는 아닌 이유는 성서의 주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케리그마적 신앙 때문입니다.

 

(2) 별세의 성서적 전거

 

별세가 영성신학의 요건을 갖춘 것은 그것이 다만 건전한 신앙 체험에 근거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확실한 성서적 기초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별세의 성서적 전거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성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별세하러 오셨고 별세를 이루신 분입니다. 별세는 십자가로 이루었고 부활로 성취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잉태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별세를 이루셨고 종말론적으로 별세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별세하셨을 뿐만 아니라 별세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제자 훈련은 결국 별세를 가르친 것입니다(지도자, pp. 280-283.). 이 예수님의 별세를 중심으로 구약은 별세의 모형(그림자)을 보여주고 사도 바울은 별세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별세의 신비를 모형으로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이 별세의 모형을 구약에서 추적하려고 시도한 것이 그의 「별세의 신비」입니다. 별세의 첫 번째 모형은 아담입니다. 특별히 아담의 잠은 별세의 깊은 신비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신비, p. 36, 72.). 선악과는 별세의 삶을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삶은 이상적인 별세의 삶을 보여주며 아담이 그 부모를 떠남으로 별세를 이룹니다(신비, p. 85.). 아벨은 순교함으로써 죽지 않고 사는 별세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주었으며(신비, pp. 116-117.), 에녹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께 돌아간 별세의 상징입니다(신비, p. 130.). 노아의 방주는 방주 밖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방주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별세의 삶의 또 하나의 모형이고(신비, pp. 142-143.),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살아 천국으로 이민 가는 별세의 상징입니다(신비, pp. 158-160.). 유월절은 홍해를 엑소더스하여 애굽을 떠남으로 별세를 보여준 구약적 절기이며(신비, p. 163), 이삭·야곱·요셉·모세·여호수아·다윗 등은 별세의 삶을 살았고 별세를 보여준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이 예수님의 별세를 보여주는 모델이라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별세를 고백하고 체험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가 가진 별세의 신앙 때문에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할 줄 알았고 또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 별세적 영성의 핵심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의 별세의 특징은 죽은 후에 별세한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별세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살아서 천국을 보았고 살아서 천국을 기뻐했고 살아서 천국을 체험했습니다(지도자, pp. 286-287.). 이중표 목사의 성서 해석이 성경을 지나치게 알레고리적으로 푼다는 평가가 있지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적 시각으로 보려는 그의 일관적 성서 해석이 별세를 주제로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게 한 것입니다.8)

그에게 성서는 철저히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신 주 곧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케리그마, p. 212.)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요 5:39)이며, 이것은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의 율법서나 예언서, 시편 등 모든 성경에 적용되는 성경해석의 기본 원리입니다(케리그마, pp. 208-210.). 별세의 주제가 성서를 관통하는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거 때문입니다.

 

(3) 별세의 정의

 

이중표 목사의 별세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별세의 정의를 직접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으로 별세의 정의가 나타난 것은 별세를 살자라는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별세는 이렇게 정의됩니다.

 

별세는 다른 세상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에 대하여 별세했다고 말합니다. 별세는 죽음으로 가는 세상입니다. 이 몸이 죽어서 그냥 가는 세상은 아닙니다. 이 몸이 죽고 또 죽어도 별세엔 못 갑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가는 세계가 별세입니다(산 자, pp. 281-282.).

 

별세가 목회자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정의된 것은 1991년 목회자의 의식개발을 주제로 한 세미나였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이중표 목사는 별세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별세란 사람이 죽음으로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별세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세계입니다. 불교의 극락이나 기독교의 천당, 낙원을 말합니다.……그러므로 별세는 죽음으로 가는 환상적인 천국이 아닙니다. 육신이 죽어서 영혼이 천국을 가는 이원론적 환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죽은 자는 천국에 못 갑니다. 이 몸이 죽고 또 죽어도 별세는 못 갑니다. 기독교의 별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만이 누리는 은혜의 세계입니다(의식, pp. 333-334.).

 

그후에 「별세의 지도자」(1994)에서도 비슷하게 정의합니다.

 

별세는 죽은 후에 오는 세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몸은 현세에 있지만 별세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천국을 누려야 합니다. 별세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만이 볼 수 있습니다.(지도자, p. 276.)

 

별세의 목회적 집대성인 「별세 목회」(1995)에서도 비슷한 방향으로 정의했습니다.

별세는 다른 세계를 말합니다.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별세는 죽은 후의 다른 세상을 말합니다. 이승이 아니요 저승입니다. 별세는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별세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별세는 몸이 죽어서 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별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만이 누리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별세의 신앙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만이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최대 은혜요 최대 행복입니다.(별세, p. 12, 29.)

 

이상의 정의를 종합할 때 이중표 목사의 별세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일반적인 별세와는 다릅니다. 일반적인 별세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과의 이별이요 사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중표 목사의 별세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또 하나의 세계입니다.

둘째로 그 세계로 가는 방법이 다릅니다. 일반적 별세는 육체적 죽음으로 갑니다. 누구나 죽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별세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중표의 별세는 죽어서 가는 세상이 아니라 살아서 가는 세상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야 가는 세상입니다.

셋째로 이중표의 별세는 지금 여기서 누리는 세상입니다. 죽은 후에 천국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천국을 지금 여기서 누리지 못하면 죽어서 가는 천국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 여기서 누려야 합니다. 영원히 살아야 할 집에서 이중표 목사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별세는 마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온 우주에 충만하여 우리가 하나님이신 영을 집으로 삼고 지금 그 안에 사는 것입니다(목자, p. 198.). 지금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안에 집을 짓고 살아야 그 삶이 영원으로 잇대어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부활에 동참하여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 곧 별세입니다. 따라서 죽음만을 의미하는 일반적 별세와 달리 이중표의 별세는 부활의 감격과 기쁨이 있는 행복한 별세입니다. 그가 별세를 말할 때마다 행복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9)

2. 별세의 신학적 주제

 

별세의 영성신학적 요소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 근거가 되는 별세의 신학적 흐름을 일반적인 신학적 틀에 따라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

 

성경은 별세를 계시한 책입니다. 별세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별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그리스도 중심의 유기적 전체를 이룹니다. 바르트의 말대로 성서의 통일은 곧 케리그마의 통일입니다.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성서는 그리스도 사건 곧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의 부활을 증거합니다(케리그마, pp. 211-212.).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닫지도 못합니다(제자, p. 168.).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의 계시는 완전합니다. 더 이상 보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는 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산 자, pp. 295-296.). 성경대로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성경보다 앞서가면 이단이 됩니다. 성경보다 자기의 이성이 앞서가면 자유주의가 되고 자기 감정이 앞서가면 신비주의가 되며 자기 생각이 앞서가면 문자주의가 됩니다(성서, p. 9.). 결국 성경은 성경 전체에서 별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를 증거하여 세상에서 그처럼 살게 하시려고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하나님

 

하나님은 별세의 창조자이며 또한 계시자입니다. 먼저 그는 창조자입니다. 그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창조자가 아니라 별세의 창조자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인간이 엿새 동안 먹고 마시며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엿새 후의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서 안식과 별세를 누리며 살기 위함입니다(행복, p. 16.). 그는 별세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또한 계시자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별세의 사람들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에 나타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별세의 계시에 따라 별세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신 최고의 별세의 계시는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은 그로 하여금 세상에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게 함으로 별세를 이루게 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별세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별세의 아들을 삼으려고 불렀습니다(기도, pp. 44-45.).

 

(3)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별세의 완성자이며 선포자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막 10:45). 그는 일생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죽는 것(별세)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목회, pp. 16-17.). 그는 십자가에 죽음으로 하늘의 장자가 되셨습니다. 누구나 큰 자가 되려면 죽어야 합니다. 세상의 장자들은 남을 쓰러뜨려야 장자입니다.

그러나 별세의 장자는 자기를 쓰러뜨려야 합니다(신비, pp. 242-243.).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에 별세의 선포자였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불러 별세를 가르치셨고 별세의 삶을 살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제자 훈련은 곧 별세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또 거절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제자들에게 별세의 신비를 가르친 제자 훈련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변화산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룰 십자가와 부활의 별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불 성령이 오셔서 할 일이었습니다(목회, p. 18.).

 

(4) 성령

 

성령은 별세하게 하는 영이요 별세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도 보았지만 예수와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부활 후에 한 것은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자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을 별세하게 했고 또한 별세의 증인들로 세웠습니다. 만일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사건은 한낱 예수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났을지 모릅니다(지도자, p. 284.). 성령은 제자들을 별세시켜 놀이하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보냈으나 놀이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은 해방의 영입니다. 성령은 제자들을 성령 안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었습니다(산 자, p. 277.). 성령은 또한 순교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됩니다. 증인은 곧 순교자입니다. 누구도 아무 때나 순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성령은 제자들을 순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순교하며 증인으로 살게 만들었습니다(목회, pp. 370-371.).

 

(5) 교회

 

교회는 별세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성도, 성도와 성도, 그리고 성도와 세상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신앙 공동체입니다. 초기 한신교회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를 근거로 다섯 가지 신앙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예배 공동체, 선교 공동체, 화해 공동체, 봉사 공동체, 민중 공동체가 그것입니다(케리그마, pp. 196-198.).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별세 공동체로 요약되었습니다. 별세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역을 목적으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역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별세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부지런히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별세에 동참케 만들어야 합니다.

 

별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 사역이요 목회자의 최대 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사람의 영혼을 죽은 후에 천국 보내는 사건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현세에서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별세신앙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최대 활동은 별세 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하여 열광한다 해도 별세의 삶을 사는 증거가 없다면 교회는 참 구원의 공동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별세의 공동체로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목회, p. 20.)

 

별세를 본질로 하는 교회의 사명은 여럿이 있을 수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별세를 누리게 하기 위해 놀이를 가르치고, 별세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순교를 가르치며, 별세를 실천하기 위해 나눔을 가르치는 것입니다.10)

놀이와 순교와 나눔은 별세의 교회가 지향하는 하나의 목표 곧 세 가지 사명입니다. 이것들을 통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사는 별세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6) 종말

 

종말은 별세한 자가 누리는 세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죽은 후에 가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지금 현세에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계가 별세입니다(목회, p. 13.). 나사로가 그 예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후에 천국에 가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죽기 전에 이미 현세에서 별세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살아서 나사로가 되지 않고는 죽어서도 나사로가 될 수 없습니다(목회, p. 28.). 별세는 현세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팔복을 주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은 칠복으로 만족하지만 세상에는 팔복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주신 복은 인간의 노력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별세로 넘어간 사람만이 팔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은 이후의 별세를 소망해서는 안 됩니다. 살아서 별세를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행복한 별세를 줄 수 있습니다(행복, 19).11)

그러나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별세는 미래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종말론적 소망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별세는 천국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습니다. 누구나 그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깨어 있어 그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산 자, pp. 293-297.). 그가 반드시 재림하셔야 할 이유는 구속을 완성시키기 위함입니다(산 자, p. 304.). 그러나 완성될 별세인 천국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바울은 이미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바울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죽고 다시 살았다고 선언합니다. 완성될 천국은 있지만 그때 가서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산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그를 따라 이미 죽고 살았습니다. 종말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별세를 오늘에 사는 자의 것입니다.12)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이중표의 별세는 신학적으로 성경에 기초하고 하나님의 계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 안에서 신자들에게도 이루어져 그 능력으로 세상에서 변화의 삶을 살며 장차 이루어질 완성될 종말을 바라보는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13)

 

3. 별세의 영성적 요소

 

웨인라이트(G. Wainwright)는 영성을 기도와 삶의 결합(combination of praying and living)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14) 하나의 영성신학이 성립되려면 그것이 지향하는 기도와 신앙적 삶에 대한 제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중표의 별세는 기도와 함께 몇 가지 중요한 영성적 삶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순교와 가난과 나눔과 축제입니다. 기도와 함께 그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도

 

기도는 별세의 삶을 살기 위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교제합니다(계명, p. 74). 기도는 연약한 피조물의 탄식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는 신자의 의무이며 권리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능력도 받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도 깨닫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다만 하나님께 나가는 수단은 아닙니다.

 

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기도와 영성의 기도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는 문제 해결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사업, 가정, 건강 등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런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기도는 욕구를 해결하고 만족하게 살게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목회, p. 34.)

 

그러나 이런 기도로는 별세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는 별세의 기도입니다. 별세의 기도는 자신을 죽여서 이루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별세를 가르치고자 주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주기도는 땅에서 성도가 어떤 자기 성취를 이루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뜻을 죽이도록 요청하기 위하여 주신 기도입니다(기도, p. 21.). 예수님은 별세의 기도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자신이 친히 별세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별세의 기도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의 대부분의 기도는 간단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죽이는 기도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조금만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나 내가 별세하는 기도는 진액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가 별세의 기도는 안 하고 능력을 받으려는 기도만 하니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모르겠다 하실 것입니다(목회, p. 35.). 십자가의 기도와 스데반의 기도는 별세 기도의 또 다른 모형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죽여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히면서도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도는 별세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자기를 죽여야 이루어집니다. 이 기도를 해야만 그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성서, p. 271.).

이중표의 별세 기도는 철저히 한 가지 목적에 집중됩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별세의 기도는 기도의 풍성함에 대한 균형을 잃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목회적 고려와 교회 성장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기도는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기도는 반드시 자기를 죽이는 요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를 죽이는 별세의 기도는 교회사에 흐르는 두 종류의 기도와 차별화되면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성공주의적 기도입니다. 성공주의적 기도는 기도를 자기 성취의 수단으로 삼고 하나님을 자기 성공의 방편으로 삼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변화된 존재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부소득에만 관심을 갖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달라지지 않으면서 받는 부소득은 우리를 타락시킬 수 있습니다. 달라지지 않은 인격이 병고침 받으면 그 병고침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인격이 물질 축복을 받으면 그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니라 거래이며 give & take의 기도요, 산울림의 기도이며, 심고 거두는 법칙의 기도입니다.15) 별세의 기도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를 성공시키는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죽이는 기도입니다.

별세의 기도는 또한 신비주의적 기도와도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동방교회의 전승은 기도의 외면성보다 내면성을 강조합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은자 테오판이 대표적으로 이렇게 기도를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그나마도 평생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기도는 말하자면 하나님과 갖는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평생의 일(vocation)입니다. 이 경우의 기도는 입술의 활동이 아니라 마음의 활동이요 동작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단점은 기도가 하나님에 이르는 신화(神華)의 사닥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평온과 내면적 상태 즉 헤시키아( hesychia)에 이르는 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쉽게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16) 신비주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를 별세시키기보다는 내가 하나님이 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피조물인 나를 세우는 기도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이 주객일치가 되게 하는 기도입니다. 별세의 기도는 기도자를 하나님 되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자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기도입니다. 기도자를 예수처럼 되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자를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기도입니다.17)

별세의 기도를 교회사에서 그 비슷한 전거를 찾는다면 아마도 본회퍼의 기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본회퍼의 기도는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제자로 세우는 자기 부정의 기도입니다. 「나를 따르라」에서 본회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의 고난의 길은 수동적이고 필연적이다.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의 신앙고백서 초안에 교회를 복음으로 인하여 쫓기는 순교자의 집단이라 하였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생명을 사람들에게 내주지 않는 자는 이미 제자가 아니다.

 

본회퍼의 기도가 별세의 기도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은 그의 기도가 자기 부정으로 시작하여 순교로 마쳤기 때문입니다. 그는 1945년 4월 9일, 나치에 의해 교수형을 받습니다. 그의 모습을 마지막 본 증언자가 그의 죽는 장면을 이렇게 남기고 있습니다.

 

아마도 5시, 6시 사이였던 것 같다. 죄수들을 감방에서 데려다가 선고문을 읽었다. 감옥의 한 방의 반쯤 열린 문을 통하여 나는 본회퍼 목사를 보았다. 죄수 옷을 입은 채 꿇어 앉아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의 열심과 확신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18)

별세의 기도는 자기 부정에서 시작하여 순교로 이어지는 기도입니다.

 

(2) 순교

 

순교는 별세 영성의 절정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신앙의 중심이라면 그것을 자기화시킨 것이 순교입니다. 별세는 자기 죽음으로 선언한 신앙고백이며 그 영성은 순교자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별세의 영성 없이 순교자가 될 수 없고 순교 없이 별세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목회, p. 36.). 순교의 주제는 이중표 목사의 설교의 초기부터 자주 그리고 강하게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아마도 별세 이전에 순교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유달리 순교자의 전기에 관심이 많았고 그 책들을 읽으면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별세의 중요한 출발이 이 순교신앙과 어떤 모양으로든지 관련을 맺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조국이여 울어라」라는 설교에서 일찍이 이 신앙고백을 나타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고 살아서 짐승의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죽지 않고 살아 있기에 교회도 시끄럽고 사회에도 부끄러운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조국, p. 15.).

 

순교의 신앙은 교회를 이끈 원동력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 옥합이 깨어지자 복음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로 갔습니다. 베드로, 바울의 순교의 피가 쏟아지니 로마 성이 흔들리고 네로의 보좌가 움직였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한국 땅에서 옥합을 깨뜨려 생명의 향유를 부었고, 주기철, 손양원 목사가 그 뒤를 이어 갔습니다.(산 돌, p. 259.)

결국 한국 교회를 이끈 것은 노회장, 총회장들이 아니라 주기철, 손양원의 순교였습니다. 그런데 이 순교는 몸이 죽는 것만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오히려 순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가 오히려 순교자입니다. 기독교의 순교가 다른 종교의 순교와 다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독교의 순교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선언한 자입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기의 부활로 받은 이후에 나타나는 사건입니다(목회, p. 351.).

별세의 순교는 내 몸이 죽는 순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순교입니다. 사건으로서의 순교라기보다는 라이프 스타일로서의 순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순교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순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죽기만 하면 순교다가 아니라 화해자로서 죽어야 순교입니다. 순교는 원수의 칼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원수의 칼을 무장해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눈을 부릅뜨고 죽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살리기 위해 기쁘게 죽는 것이 순교이기 때문입니다(목회, p. 353.).

순교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믿음의 순교자, 행동하는 순교자, 민중의 순교자, 가난의 순교자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진정한 순교는 화해자여야 합니다. 만일 그가 화해자로 살았다면 그의 몸이 죽지 않았을지라도 순교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몸을 불살라 순교했더라도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의 증인으로 살지 않았다면 그는 순교자가 아닙니다. 순교의 표준은 죽었느냐 안 죽었느냐가 아니라 화해의 제물로 죽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화해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순교입니다. 이 신앙으로 선교하면 그 선교는 순교요 이 신앙으로 복음을 증거하면 그 증거는 곧 별세의 증거입니다(목회, pp. 354-355.).

별세의 순교는 몸의 죽음을 뛰어넘어 화해와 증거의 실천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순교의 의미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사실 2천 년 기독교 순교사의 핵심을 이해한 것입니다.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에는 많은 순교자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 중의 한 기록은 초대교회 순교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방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순교자라고 선언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이름이 나타나기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순교의 권능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며 이교도들에게는 담대함과 인내와 용기를 보여준 반면,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자신들이 순교자라는 칭호로 불려지는 것조차 부인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소한 사람들 앞에 자신들을 변증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고소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고난을 준 사람들을 위해 스데반처럼 기도했으며 언제나 원수들을 향하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던 자들이다. 자신을 돌로 친 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으니 하물며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했겠는가?19)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화해의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스데반처럼 자기를 괴롭힌 자들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순교하기 위해 살지 않고 순교적 삶을 살다 순교한 것입니다. 별세의 순교는 오늘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죽고 사는 순교입니다. 자기 부정은 자기 멸절이나 자기 학대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3) 가난

 

가난은 스스로 가난해지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별세 영성의 꽃입니다. 포기와 자기 부정을 생명으로 하는 십자가의 영성은 물질에 대해서도 스스로 사유화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물론 가난이 미화되거나 정당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게을러서 가난하고 부지런히 일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될 수 없습니다. 아리마대 같은 의로운 부자도 있으며 욥 같은 쓰임받은 부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별세의 영성은 가난을 요청합니다. 모든 것이 빚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은 빚지고 살고 부자는 꾸어주고 삽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기독교는 가진 자가 빚진 자입니다. 복음도 빚이요 은혜도 빚이며 물질도 빚입니다(목회, pp. 238-253.). 무엇보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예수님처럼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벌어서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자를 구제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부요한 자로 살지 않고 스스로 가난해지셨습니다. 내가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을 줌으로써 부요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난해짐으로써 부요케 되는 것입니다.(목회, p. 31.)

별세의 가난의 가장 전형적인 모델은 성 프랜시스입니다.20) 성 프랜시스가 가난의 모델인 것은 그는 스스로 가난해진 그리스도를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처음엔 자기 아버지의 것을 가져다 구제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 다음에는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해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은 최고의 성자가 되었습니다(목회, p. 31.).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불쌍한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우리 옷을 벗어 임자에게 돌려주자 했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누가 우리 옷의 임자입니까? 프랜시스가 말했습니다.

우리의 것은 다 하나님께 빌려온 것이다. 모든 것은 필요한 자의 것이요 필요한 자가 주인이다.(선교, p. 246.)

별세의 가난은 민중신학적인 빼앗긴 가난이 아니라 자원적인 가난입니다. 수탈된 정치적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가난하게 됨으로써 가난한 자와 동일시되는 성(聖) 가난입니다. 앤서니 키오라(Anthony J. Ciorra)가 Saint Francis of Assisi and liberation theology라는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해방신학의 가난과 성 프랜시스의 가난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해방신학의 가난과 달리 성 프랜시스의 가난은 여섯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프랜시스는 가난한 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졌습니다. 둘째, 그는 아버지를 떠나 가난한 자에게 갔습니다. 셋째, 그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기 위해 그의 사회적 신분까지 포기했습니다. 넷째, 그는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을 주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었습니다. 여섯째, 그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말로 가르치지 않고 몸소 실천했습니다.21) 프랜시스에게 가난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복음적인 문제였습니다. 그가 가난한 자들 속에서 본 것은 가난 자체가 아니라 가난한 그리스도였습니다. 가난 이전에 그리스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프랜시스의 가난은 그리스도 중심적(복음적) 가난의 영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프랜시스의 영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To be naked, following naked Christ(벌거벗은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하여 스스로 벌거벗는 것).22)

별세의 가난이 프랜시스의 가난과 만나는 지점은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성과 자원적 가난에 있습니다. 왜 가난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가 스스로 가난해지셨기 때문입니다(고후 8:9). 그로 인해 그는 민중을 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민중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구제와 자선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도우려고 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목회, p. 283.). 별세의 가난은 수도원에서처럼 가난을 죄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교회사에 등장하는 카파르파나 왈도파와 같이 가난을 이상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가난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미화될 수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가난해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에서 예수께 빚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나눔

 

가난이 별세 영성의 소극적 실천이라면 나눔은 적극적 실천입니다. 본래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나눔입니다. 십자가는 곧 밥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는 것 자체가 별세입니다. 죽지 않고는 자기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 있는 사람은 결코 남과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나눔의 생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밥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의식, p. 24.). 예수의 몸은 함께 나누는 밥이며 예수의 피는 함께 나누는 생명의 잔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나눠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민족의 분단 현실에서 화해를 위한 밥이 되어야 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밥이 되고 갈등이 있는 곳에 평화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가진 자는 모두에게 필요한 밥이 될 수 있습니다.(목회, p. 264.)

 

스스로 가난하게 되는 별세의 가난은 가난한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제나 자선의 포기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물질로 구제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적 구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구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분배와 나눔은 물질적인 것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나눔을 실천하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 나눠져야 합니다(목회, p. 290.).

또 반드시 가난한 자에게만 나누는 것도 아닙니다. 부자도 어떤 면에서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분법적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부자도 예수 안에서 해방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목회, p. 291.). 별세의 나눔은 물질적인 나눔만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모든 가난이 구조악에서 왔다고 보는 입장에도 반대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 전부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교회는 누구에게나 나누어줄 것이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민중이 복음에서 제외되는 일은 없습니다.

 

민중이 부자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민중선교가 아니라 부자에게 민중선교가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가난한 자를 더 불쌍하게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더 불쌍한 자입니다.(목회, p. 292.)23)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하든 부하든 교회는 복음을 나누고 영성을 나누고 그리고 빵(밥상)을 나눠야 한다. 교회는 함께 먹는 밥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목회, pp. 255-274.).

 

(5) 축제

 

축제는 별세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성도의 행복한 삶입니다. 별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죽이는 일이지만 그것은 수도승 같은 고행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축복을 동반합니다. 본래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두 가지입니다. 영생과 행복입니다. 영생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영생은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노래, p. 179).

예수와 함께 여기 있는 곳이 좋사오니(눅 9:33)라고 고백할 때 성도는 이미 행복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죽고 예수 안에서 살면 어디로 가든지 예수로 만족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영화, p. 110.). 행복의 근원은 심리적인 것인 아니라 케리그마적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행복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고통을 대가로 행복의 마르지 않는 샘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산상 팔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천국은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이며 팔복은 그 행복의 대헌장입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초청하는 별세의 삶의 극치입니다.(행복, p. 3.)

 

별세의 사람들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노래하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죽음을 이미 선언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 어디에도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도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전도, p. 16.).

한신교회가 놀이터에서 창립된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 있는 일입니다. 교회는 근본적인 별세 공동체요, 별세 공동체는 곧 놀이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축제로 풍악을 울리고 춤추며 한마당 잔치를 벌이는 곳입니다(산 자, p. 270.). 별세의 행복은 자기 만족적이며 심미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그 행복은 공동체적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적 행복의 현장이요, 목사는 그 행복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양과 함께 노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의 털을 깎고 젖 짜는 것은 목장 주인이 하는 일이요, 목자는 양과 함께 놉니다. 목사는 교인들을 신령한 예수 놀이에 참여시켜야 하며 교회를 잔칫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축제적 놀이는 성령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은 놀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평안과 자유와 해방을 얻어 사람으로 하여금 놀게 합니다. 초대교회는 그런 의미의 놀이 공동체요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목회, pp. 110-130.).

별세가 수도원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성화에의 계속적인 강조는 별세의 구도자들로 하여금 별세가 기왕 한국 교회에 횡행했던 또 하나의 금욕주의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나 축제와 행복, 놀이에의 또 다른 강조는 그 어두운 암갈색 바다를 지나가게 만듭니다. 별세는 자기 죽음의 영성일 뿐 아니라 또한 자기 승리의 영성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를 둘로 만들고 둘을 하나로 만듭니다. 「별세의 목회」에 나오는 별세의 다양한 측면들이 이 십자가-부활의 양면성을 구조적으로 보여줍니다.

별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죽음에 이르는 순교의 영성이며(목회, pp. 343-371.), 동시에 자기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살림의 영성입니다(목회, pp. 65-86.), 별세는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나그네의 영성이며(목회, pp. 131-152.), 동시에 스데반처럼 땅에서 순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주시는 상급의 영성입니다(목회, pp. 297-316.). 별세는 또한 받은 빚 때문에 감격해하면서 우는 빚진 자의 영성이며(목회, pp. 237-254.), 동시에 그 빚을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 밥상의 영성이며(목회, pp. 255-274.), 배고픈 민중에게 사랑과 복음을 나누는 민중의 영성입니다(목회, pp. 275-296.).

별세 안에 있는 이 십자가-부활의 구조 곧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양면성을 보지 않으면 별세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죽음이 별세의 십자가적 측면이라면 놀이와 행복은 별세의 부활적 측면입니다.24)

 

1) 이중표, 「죽어도 행복합니다」, pp. 38-47.

2) Philip Sheldrake, Spirituality and Histoy-Questions of Interpratation and Method(New York: Crossroad, 1992), p. 33.

3) 별세의 영성신학적 토론으로는 김경재의 문화신학적 접근과 박재순의 아시아 영성신학적 접근이 있다. 김경재, 별세신학의 문화신학적 고찰, 「별세신학」, pp. 376-294. 박재순, 아시아 영성신학으로서의 별세신학, 「별세신학」, pp. 295-330. 김경재는 별세신학을 거듭남의 신학, 중생체험의 영성신학이라고 부르고(별세신학, 281), 박재순은 자기 부정과 실천적 삶의 영성이라고 부른다(「별세신학」, p. 326).

4) 여기에서 참고한 이중표 목사의 문헌과 발제에 쓰인 약자는 다음과 같다. 광야의 기적(1982/광야), 조국이여 울어라(1983/조국), 제자의 길(1984/제자), 산 돌의 교회(1985/산돌), 주일인생의 행복(1986/주일), 빈 무덤의 신비(1987/빈 무덤), 엿새 후의 은혜(1988/엿새), 민족의 희년(1990/민족), 산 자의 행복(1991/산 자), 인생주막(1993/인생), 살아 있는 성전(1995/성전), 하늘의 우렛소리(1997/우레), 노래하는 나그네(1998/노래), 영화로운 예정(2000/예정). 별세의 행복(1993/행복), 별세의 지도자(1994/지도자), 별세의 가정(1994/가정), 별세의 목회(1995/목회), 별세의 기도(1996/기도), 별세의 계명(1997/계명), 별세의 신비(1997/신비), 별세의 목자(1997/목자), 별세의 사랑(1998/사랑), 교회발전을 위한 목회개발(1988/목회개발), 교회 발전을 위한 설교개발(1989/설교), 교회 발전을 위한 인격개발(1990/인격), 교회 발전을 위한 영성개발(1991/영성), 교회 발전을 위한 의식개발(1992/의식), 교회 발전을 위한 선교개발(1993/선교), 교회 발전을 위한 지도력개발(1994/지도력), 교회 발전을 위한 성서개발(1995/성서), 교회 발전을 위한 교회개발(1996/교회), 교회 발전을 위한 교육개발(1997/교육), 교회 발전을 위한 예배개발(1998/예배), 교회 발전을 위한 치유개발(2001/치유), 교회성장과 케리그마(1988/케리그마), 나는 매일 죽는다(1999/매일), 하늘을 품는 마음(1998/하늘), 별세신학(1999/별세신학),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2004/ 죽어도).

5) 이중표 목사의 삶의 과정은 「나는 매일 죽는다」에 전체적으로 소개된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간단한 정신분석학적 이해는 정태기, 별세신학에 나타난 전인건강에 관한 연구, 「별세신학」, pp. 376-384를 참고하라.

6)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본문으로 한 최초의 설교, 나의 주님 오직 예수(빈 무덤, pp. 18-28.)에는 훗날 그가 말한 별세의 신앙이 충분히 나타나 있다. 다만 이 설교에서 별세란 단어가 아직 쓰이지 않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별세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설교 엿새 후의 은혜(엿새, pp. 148-158.)는 기왕에 그가 발견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요절을 복음서 안에서 재발견한 별세 신학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7) 이중표의 별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교회성장과 케리그마 설교」(쿰란, 1988)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8) 이중표 목사의 성서 해석에 대한 평가를 권성수, 강단의 인습 타파: 이중표 목사의 별세적 성서 해석, 「별세신학」, pp. 52-99를 참고하라. 권 목사는 이중표의 성서 해석을 저자지향, 텍스트 지향이 아니라 독자 지향적 성서 해석이라고 하며(「별세신학」, p. 75.),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의 틀에는 맞지 않지만, 성경 전체의 사상과는 일치한다(별세신학, p. 98.)고 한다. 하지만 영원히 객관적인 신학적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백지상태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없으며 자기 나름의 전제와 전이해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자기의 문제와 질문을 가지고 성경을 접근할 필요가 있다. 참고, Walter C Kaiser and Moises Silva, An Introduction to Biblical Hermeneutics: The Search for Meaning(Grand Rapids: Zondervan, 1994), p. 245.

9) 이러한 이중표의 별세 이해는 시간이 갈수록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된다. 2005년에 출판된 「별세신학」에서는 별세가 삼위일체적 도식에서 이해된다. 즉 별세는 자기 죽음, 새로운 삶, 세상을 살림이다(「별세신학」, pp. 36-42.). 죽음, 삶, 살림의 세 도식은 기왕의 별세가 죽음, 부활의 두 도식으로 이해된 것에 비해 더 발전된 형태다. 이러한 별세의 삼중적 구조는 별세에 대한 어원적 석의에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별세의 어의적 근거인 누가복음 9장 31절에 등장하는 별세의 원어는 텐 엑소돈 아우투이다. 이 말이 한글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별세로 번역되고 표준새번역에는 죽으심, 공동번역에는 죽음, 현대어 성경에는 죽으실 일로 번역되어 있다. 많은 영어성경도 별세죽음, 떠남과 관련해서만 번역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KJV는 his decease, NKJ는 His decease, NIV는 his departure로 번역했고, Anchor Bible도 his departure로 번역했다. 만일 별세가 다만 죽음, 떠남뿐이라면 이중표가 누가복음 9장 31절에서 묵상한 별세는 지극히 주관적, 자의적 해석이 되고 말고 그 위에 세워진 별세신학은 단순한 죽음의 신학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많은 주석학자들이 누가복음 9장 31절의 별세(텐 엑소돈 아우투)를 죽음뿐 아니라 부활, 심지어 승천의 의미로까지 해석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Anchor Bible 누가복음 9장 31절 주석이다.

Speaking of his departure. I.e. of his exodus. The meaning of this word is debated. Many commentators, appealing to 2 Pet a:15; Wisd 3:2; 7:6; Josephus Ant. 4,8,2 §189 [exodus tou zen], have argued that it means Jesus death. So Creed, Gospel, 134; Schurmann, Lukasevangelium, 558; M.J. Lagrange, Luc, 272. Michaelis (TDNT 5. 107) is probably right in refusing to understand it as a reference to the resurrection, i.e. Jesus coming out of the grave. on ther other hand, what Jesus is to complete(or fulfill) in Jerusalem is not just his death(even though Juke 13:33 may hint at that) but also his analempsis, ascension(9:51). Hence a number of writers have insisted that one should rather understand exodus not only of Jesus death, but of his entire transit to the Father ending in the ascension. Thus J. Manek, The New Exodus; A. Feuillet, RevThom 77(1977) 189-192; Schneider, Evangelium nach Lukas, 216; E. E. Ellis, gospel, 143. This certainly seems to fit in better with the geographical perspective of Lucan theology.?Joseph A. Flitzmyer, Anchor Bible,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1-1X, 800)

이 주석은 누가복음 9장 31절의 별세(텐 엑소돈 아우투)가 단순한 죽음을 넘어선 그 이상의 의미를 포괄한다고 말하고 있다. Manek, Feuillet, Schneider, 그리고 Ellis 같은 학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누가복음 9장 31절이 누가 신학의 지리적 배경에서 볼 때 죽음보다는 오히려 승천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누가복음 9장 31절을 부활과 관련하여 해석한 학자도 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의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부활을 말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Carlston 같은 학자가 그렇다. Carlston, C.E, Transfiguration and Resurrection, JBL 80(1961), pp. 233-240.

요약하면 누가복음 9장 31절의 별세(텐 엑소돈 아우투)는 어원적으로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1) 단순한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거나 (2) 부활을 의미하거나 (3) 승천까지를 포함한다. 문자적으로만 볼 때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의미상으로 볼때 그것은 부활을 의미하며, 문맥적으로 볼 때 그것은 승천을 포함한 전체적 구원을 의미한다.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이중표의 삼중적 별세 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을 별세의 삼중적 이해와 연관시키면 (1) 별세는 우선 자기 죽음이요 (2) 또한 새로운 삶(부활)을 포함하며 (3) 긍극적으로는 승천으로 전 세계를 살리는 세계 살림이다.

10) 별세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중표의 논의는 그의 「별세의 목회」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별세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인생주막이란 설교에 그림처럼 나타난다. 교회는 신령한 주막집이며, 목사는 주막집 주인이다. 주막집인 교회는 나그네들인 교인들을 먹인다. 쉬게 한다. 술 마시게 한다. 그리고 길을 안내한다. 「인생」, pp. 377-391.

11) 이러한 별세의 현세적 강조 때문에 별세의 종말론이 현세적 종말론에 치우쳤다는 김경재의 평가가 있다. 별세신학은 현재적 영원 오늘 여기에 임하는 하늘나라에 역점을 두었다. 다시 말하면 종말론의 용어로 말하면 실현된 종말론, 실존적 종말론에 치우쳐 있다. 물론 복음적 신앙이 주목하는 삶은 오늘 여기에 임한 하늘 백성의 삶이다. 타계주의적, 역사도피적 영성은 복음주의가 아니다. 「별세신학」, p. 293.

12) 별세의 종말론에 대한 김균진의 균형 잡힌 평가를 보라. 김균진, 별세신학의 종말론, 「별세신학」, pp. 153-154., 秊?위에 있는 타향과 하늘에 있는 본향에 대한 이중표의 구분은 그가 마치 타향과 본향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며 타향 곧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러나 이중표가 말하는 별세는 그리스도인이 단순히 타향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이 땅에서 본향 곧 별세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중표가 말하는 하늘의 영원한 본향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요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이다. 그것은 오늘날 종말론이 말하듯이 이미 아직 아님(already not yet)의 변증법적 긴장관계 속에 있다.?13) P. Sheldrake에 의하면 좋은 영성이란 단순히 기도의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의식 있는 관계를 갖는 신자들의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폭넓게 이해되어야 한다(Spirituality is understood to include not merely the techniques of prayer but more broadly, a conscious relationship with God, in Jesus Christ, through the dwelling of the Spirit and in the cotext of the community of believers)고 한다. 다시 말하면 좋은 기독교 영성은 반드시 삼위일체적이고, 기독론적이고, 교회론적(trinitarian, christological, and ecclesial)인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Sheldrake, pp. 52-53.). 이런 점에서 이중표의 별세는 좋은 영성의 신학적 근거를 구비했다고 본다.

14) Geoffrey Wainwright, Types of Spirituality, Jones, G. Wainwright, E. Yarnold, The Study of the Spirituality(N.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p. 592.

15) 조용기, 「오중 복음과 삼박자 축복」(서울: 영산출판사, 1983), p. 280.

16) 동방기도에 대해서는 Kallistos Ware, ?ays of prayer and contemplation 1: Eastern? ed., by Bernard McGinn, John Meyendorff, and Jean Leclercq, Christian Spirituality-Origins to the 12the century, pp. 395-414. 신비주의 기도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오리겐(c.185-254)의 정화, 조명, 연합의 도식, 아빌라 테레사(1515-1582)의 7개의 집,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의 갈멜산 등정 등이 그 예이다. 참고, 박영만, ibid., pp. 59-67, pp. 148-163.

17) 본회퍼, 「나를 따르라」(대한기독교서회, 1965) 허역 역, p. 74.

18) 박봉랑, 「기독교의 비종교화」(범문사, 1975), p. 111에서 재인용.

19) Eusebius Pamphili, Ecclesiastical History, tran., by Roy J. Deferrari(New York: Fathers of the Church, Inc., 1953), 5권 2장, 하나님의 사랑하는 순교자들이 어떻게 그들을 핍박한 사람들을 섬겼는가? 참고.

20) 이중표 목사의 저작에는 성 프랜시스가 빈번히 나타난다. 역사상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성 프랜시스는 이중표 목사가 가장 닮고 싶은 인물 중의 하나다. 이중표 목사가 성 프랜시스를 인용한 내용과 그 출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을 사랑한 프랜시스: 조국, p. 117. 산 자, p. 235. 기도, pp. 93-94. 행복, p. 53. (2) 겸손한 프랜시스: 조국, p. 181. 성전, p. 41. (3) 사랑을 실천한 프랜시스: 빈 무덤, p. 238. 민족, p. 143. 산 자, p. 157. 성전, p. 137. 행복, p. 49. 성서, p. 274. 선교, p. 246. (4) 평화의 사람 프랜시스: 성전, p. 193, 201, 행복, pp. 151-152, 167 (5) 기도의 사람 프랜시스: 성전, p. 201. 기도, p. 205. 행복, pp. 151-152. 지도력, p. 220. 교육, p. 150 그러나 가장 많은 빈도수를 차지하는 것은 가난한 프랜시스이다. 가난과 관련한 성 프랜시스 인용은 산 자, pp. 336-337. 지도자, p. 132. 목회, pp. 101-102. 행복, p. 35. 의식, p. 21, pp. 326-327. 선교, pp. 243-244, 246 등이다.

21) Anthony John Ciorra, Saint Francis of Assisi and liberation theology (U.M.I, Fordham University, 1991), pp. 322-325.

22) Eric Doyle & Damian McElrath, St. Francis of Assisi and the christocentric character of Franciscan life and doctrine, Franciscan Christology. ed., by Damian McElarath(Assisi, 1980), 1-13. 저자는 프랜시스의 영성의 핵심을 ?nconditional love for Christ澾箚?한다(p.3.).

23) 별세의 영성이 반민중적 영성이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민중에 관한 관심은 민족통일을 위한 교회의 기도(엿새, pp. 350-360.)를 참고하라. 민중의 존재나 그 중요성은 인식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이며 물성이 아닌 영성으로 선교해야 한다고 한다(목회, p. 30.).

24) 학자들은 이것을 영성의 아포패틱(apophatic), 카타패틱(cataphatic)이라고 부른다. apo는 without(없이), phatic은 image(이미지), cata는 with(가지고)의 뜻이다. 따라서 아포패틱(apophatic)는 이미지 없이의 뜻으로 부정적인 영성에 쓰이고, 카타패틱(cataphatic)은 이미지를 가지고의 뜻으로 긍정적인 영성을 부를 때 쓰인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에카르트 등은 아포패틱 영성의 대표이고, 토마스 아퀴나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등은 카타패틱 영성의 대표자이다.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ed., by Michael Downey(A Michael Glazier Book, The Liturgical Press, 1992), pp. 14-17, 70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