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Seminar

[한신별세세미나-19차]_영성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별세신학의 영성과 목회(2): 이윤재목사)

샬렘하우스주방장 2013. 8. 9. 17:00

 

별세신학의 영성과 목회(2)

 

 

 

이윤재 목사 (별세목회연구원장)

 

 

서론

 

지난 시간에 이어 두 번째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별세를 영성적 목회 현장에서 보며 그것이 갖는 특징과 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별세의 목회적 자리

 

별세는 목회 현장에서 탄생하고 목회자에 의하여 제기되었습니다. 별세의 영성이 목회의 영성인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따라서 별세를 목회 영성적 관점에서 살피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1)

 

(1) 목회의 본질

 

별세의 목회는 교인들을 별세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하는 데 있습니다. 별세를 이루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 선교 과제라면 교인들을 별세시키는 것이 목회의 최대 과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다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탄식하는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광야를 배회하고 있는 사람들로 살고 있습니다. 목회는 교인을 애굽에서 나오게 할 뿐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일입니다(목회, p. 25.). 목회에는 네 개의 방이 있습니다. 골방, 정방, 유방 그리고 사방(死房)입니다. 골방은 기도하는 방입니다. 정방은 사랑을 나누는 방입니다. 유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는 방입니다. 사방은 죽는 방입니다. 사랑의 최고 극치는 죽음입니다. 죽어줄 수 있는 사랑만이 최고한 사랑입니다. 신자는 이 네 방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 행복의 최고 방은 역시 사방입니다(지도자, pp. 78-92.).

 

교인들을 별세시켜 예수의 제자로 살게 하는 데 목회의 본질이 있다면 그 목회는 소위 성공주의 목회와는 차별화됩니다. 별세의 목회가 한국 교회에 던진 신선한 도전이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인수를 증가시키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요 목회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일부 잘못된 목회관에 대해 목회자의 케리그마적인 인격개발이 목회자의 최고 사명이요 그리스도를 닮은 별세 신앙인을 만드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것은 지금까지 계속된 목회자 세미나를 통해 한국 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2) 이러한 관점은 이미 그의 케리그마 설교론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현재 급성장한 한국 교회의 설교 유형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복음의 메시지가 변질되어 물량주의와 기복 사상에 중심을 둔 설교로 전락된 것이다. 이 물량주의는 교회의 세속적 가치에 대한 무비판적 결과로 생겨났고 그것의 목표는 성공이며 표준은 크기(size)로 나타난다. 이것은 성공과 성장을 핵으로 하는 교회 성장론 곧 실적이 찬양받고 승자가 사랑받는 북미문화의 문화적 귀결이다. 물론 이 물량주의가 여러 가지 면에서 침체의 늪에 빠져 있는 교회들에게 의욕과 활력을 불어넣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량주의적 성공주의는 교회 성장을 위한 거룩한 실용주의(consecrated pragmatism)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물량주의적 성공주의는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훼손하여 그리스도의 상리화(商利化), 그리스도의 이윤 동기화(profit motivation)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과법칙화로 갈 우려가 높다(케리그마, pp. 130-131.).

 

물론 이것은 별세의 목회가 반성장주의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성장되어야 하며 교인수는 증가하여야 합니다. 교회 성장을 위한 신학이나 이론, 프로그램들은 연구하고 도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 성장이 목회의 본질은 아니며 교인수의 증가가 목회 성공의 표준은 아닙니다. 교회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변화된 성도의 삶의 질과 비례하고 목회의 성공은 목회자가 얼마나 이루었느냐보다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았느냐와 비례합니다. 이것은 결국 성공한 목회로부터 위대한 목회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성공적인 목회는 눈에 보이는 물량으로 평가되지만 위대한 목회는 눈에 보이지 않은 자기 죽음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인격, p. 16.). 별세의 목회는 위대한 목회를 추구합니다.

 

(2) 목회자의 사명

 

목회자의 사명은 목회의 본질과 관련됩니다. 목회의 본질이 교인들을 예수 제자로 별세시킨 데 있다면 목회자의 사명은 역시 그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할 것은 사업이 아닙니다. 사업은 목회자를 성공시키지만 위대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모두가 사업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큰 교회, 큰 건물, 큰 사업에 경쟁이 붙었습니다. 크게 일하는 사람은 성공한 줄 알고 작은 교회를 맡은 사람은 실패한 줄 알고 기가 죽어 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가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손과 발을 못박히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의식, pp. 9-10.)

 

목회자가 할 일은 큰 사업이 아니며 그렇다고 교인들을 별세시키기 위해 고치는 일도 아닙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할 일은 자기가 먼저 죽는 일입니다. 목회자가 죽으면 교인 전체가 죽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듯이 목회자가 죽으면 교인들이 죽습니다. 목회는 목사가 교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죽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회관은 이중표 목사의 초기 설교에서부터 이어지는 일관된 목회관입니다.3)

따라서 목회자가 싸워야 할 최대의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때 빌라도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싸웠습니다. 네로 황제가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으나 바울은 그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싸움의 대상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것이 그의 싸움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죽이는 유대인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원수처럼 달려들었으나 스데반은 눈을 들고 하늘을 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싸움의 대상을 압니다. 끝까지 자기와 싸웠습니다(지도자, pp. 60-61.). 목회자가 자기와 싸우는 방법은 네 가지입니다. 기도로 싸우고, 말씀으로 싸우고, 십자가로 싸우고,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싸웁니다(지도자, pp. 62-71.). 목회자가 자기와 싸워 케리그마적 인격을 맺고 별세의 삶을 살면 목회는 저절로 됩니다. 목회자의 최고 목회는 결국 자기 목회입니다. 자기 목회가 되면 다른 목회는 쉽게 되는 것입니다.

 

(3) 목회의 요소

 

별세의 목회는 목회의 모든 분야에서 별세를 추구하는 목회입니다. 별세의 목회는 목회 방법론을 추구하는 목회는 아닙니다. 항상 별세의 원리가 목회의 모든 영역에 흐르게 하는 목회입니다. 여섯 가지를 살펴봅니다.

 

1) 예배

한신교회는 처음부터 예배 공동체로서 시작되었습니다. 한신교회는 초대교회 신앙 전통을 이어받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감격적인 축제적 예배 공동체가 될 것이다(케리그마, pp. 196-197.). 그러나 그 예배는 다만 모여 찬송하고 헌금 내는 예배가 아닙니다. 구약에서 제물이 없이는 예배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물이 있어야 예배이며 하늘의 불도 그때 임했습니다. 예배는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헌신(롬 12:1-2)입니다. 자기 죽음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주님은 또 다른 죽음을 예배 때마다 요구합니다. 제물이 되지 못한 동물 때문에 성전이 항상 시끄럽습니다. 예배는 십자가로 자기를 죽여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자에게 임하는 부활의 영입니다. 제물은 몸뿐만 아니라 물질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보물이 있는 그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는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헌금은 그 사람의 헌신도를 평가하는 좋은 기준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자기 죽음만 요구하지 않습니다.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안식은 별세한 자가 예배를 통하여 누리는 평안입니다. 안식은 창조의 완성이요 최대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은 심리적 자기 평안과는 구별됩니다. 안식은 자기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누리는 별세의 축복입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이 예배를 통하여 안식을 얻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에 감동적인 찬양이 없고 감격적인 설교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욕심을 품고 거기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묶어 바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것만 생각하며 탐욕을 품고 거기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별세의 예배는 인간의 욕구(need)를 만족시켜 주는 예배가 아니라 십자가의 멍에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예배입니다. 이 예배가 진정한 안식을 가져옵니다(목회, p. 335.).

 

2) 설교

목회자는 설교를 통하여 별세의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별세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해야 합니다. 성경의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보며 성경 전체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깨닫도록 설교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최대 과제는 설교를 통해 예수가 남게 하는 것이다. 만약 설교를 통하여 예수를 남게 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안개 낀 날 장비가 없어서 착륙하지 못하는 비행기와 같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교에서 예수가 남게 해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자신의 유창한 언변이 남지 않도록, 자신의 화려한 지식이 남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케리그마, p. 281.).4)

 

별세적 설교는 또한 신자들을 행복하게 하는 설교입니다. 별세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이요 행복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았으면 교인들을 불행하게 한 것입니다.

 

목회는 곧 교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면 목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류를 행복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를 잘못 전해 교인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면 목회자는 회개해야 합니다(지도자, p. 294.).

 

별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신자들을 별세시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설교입니다.

 

3) 교육

별세는 교육을 더 구체적으로 깨닫고 변화하게 됩니다. 별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때 이루어집니다. 한국 교회에서 지금까지 공헌한 제자 훈련은 그런 점에서 유익한 교육 방법입니다. 교인들을 별세시키는 것은 설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소그룹으로 모이게 하고 목회자가 직접 삶을 나눠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과 정성을 쏟아도 예수님이 하셨던 제자 훈련을 따라 하지 않으면 성서적 제자 훈련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제자 훈련은 성경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별세의 훈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가서 제자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궁극적인 진리가 자기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죽으시고 스승이 되신 후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는 교리나 윤리를 배우는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얻는 사실을 배우는 제자입니다(교회, p. 335.).5)

 

별세 제자에게는 성경을 가르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를 가르치되 겟세마네에서 자기를 죽인 예수님의 기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성공보다는 희생을 가르쳐야 하고 성취보다는 섬김을 가르쳐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 포기를 가르치지 않으면 예수 믿고 더 욕심 많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탐욕과 감정으로부터 자유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비우고 헌금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 몸을 남을 위한 제물로 내놓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순교적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지도자, pp. 268-270.). 별세의 교육은 성경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예수님의 별세의 삶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4) 선교

별세의 선교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교회의 존재 근거라면 그 선포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케리그마의 선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동시대적이 됩니다(케리그마, p. 233.). 그러나 그것을 선포하는 목적이 중요합니다. 보통은 교회 성장을 위하여 선포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영혼 구원을 위하여 선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천국 가기 위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성장을 바라는 마음과 선교 열정은 다릅니다. 선교 열정이 없는 교회 성장은 다만 사업적인 욕망일 뿐입니다. 교회만 성장시키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일 뿐입니다.(선교, p. 11.)

 

다만 교회 성장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가 아닌 이유는 신자를 예수 제자로 만들지 않고 교회에 앉혀 놓기만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선교는 순교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할 때 마친다는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과 어원이 같습니다. 이 말은 죽는 것이 선교의 끝이라는 말입니다. 선교는 곧 죽음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당 짓기 위해 목숨 걸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성장을 위하여 목숨 걸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목숨 걸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예수 제자로, 별세의 제자로 만드는 그 일에 목숨 걸어야 합니다(선교, pp. 15-16.).

 

그러나 이러한 선교는 성령이 임할 때만 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의 증인(마르투스)은 곧 순교자입니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순교로서의 선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순교적 증인으로 세우는 영입니다(목회, pp. 370-371.). 따라서 별세의 선교는 교회당을 크게 짓거나 외국에 선교사를 보낸다는 의미의 외적 사건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 선교가 마치 물량으로 혹은 실적으로 평가되는 이 때에 이러한 의미의 선교는 선교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별세의 영성신학적 평가

 

지금까지 별세를 주로 영성적 측면 혹은 교회 안에서의 영성 목회적 측면에서 살폈습니다. 이제는 그것들을 영성신학적 측면에서 평가할 차례입니다. 크게 네 가지로 평가하고자 합니다. 케리그마적 영성, 사도적 영성, 한국적 영성, 그리고 종말론적 성화의 영성입니다.

 

 

(1) 케리그마적 영성

 

별세의 영성의 첫 번째 특징은 케리그마 영성에 있습니다. 여기서 케리그마는 크게 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를 의미하고 좁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합니다.6) 별세의 영성은 철저하게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케리그마는 별세 이전의 이중표 목사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그에 의하면 설교도 케리그마적이어야 하고 교회 성장도 케리그마적이어야 합니다. 케리그마적 설교는 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의 인격과 삶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교훈적, 교리적, 예언적, 치유적 설교와 다릅니다. 나는 「매일 죽는다」에서 이중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모든 설교의 기초를 케리그마 인격에 둡니다. 케리그마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저의 신앙으로 바꾸어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의 생각으로 현실을 판단하며 예수의 마음으로 미래를 보는 영성입니다. 결과적으로 설교는 예수의 영성과 인격으로 배태된 작품입니다.(매일, pp. 246-247.)

 

케리그마적 교회 성장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와 갖는 깊은 관계를 그 본질로 하기 때문에 수나 양과 같은 가시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교회 성장학의 성장과 다릅니다(케리그마, pp. 96-103.).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교회 발전을 위한 영성 개발 세미나에서 별세의 영성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성서적 영성, 둘째, 십자가의 영성, 셋째, 순교와 부활의 영성.

첫째, 별세의 영성이 성서적 영성인 이유는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누구든지 성서를 제외하고 기독교 영성을 말할 수 없습니다. 성서는 많은 교훈, 많은 문학, 많은 철학으로 가득 찼지만 결국 성서가 보여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 5:39).

둘째,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죽음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은 십자가에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목표요, 그가 가르친 진리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이 결국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영성, p. 270.). 영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는 것입니다. 영성은 지식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은 내가 십자가를 아노니가 아니라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입니다(갈 2:20).

신학은 지식이지만 영성은 체험입니다. 영성은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중요한 것은 그가 십자가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7)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혔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영성, pp. 274-280).

셋째, 그런데 그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고 부활하게 하는 분은 성령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는 것이 수도원적 고행이 아닌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며 십자가에 죽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순교자로 만드는 영입니다. 그리고 그 자기 죽음이 자기 부활이 되도록 돕는 영입니다. 영성은 십자가 체험이지만 십자가의 어두운 자기 죽음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의 새 아침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괴정을 성령이 하십니다(영성, pp. 285-298.).

별세의 영성이 케리그마에 근거한 성서적 영성이라는 것은 별세의 영성이 갖는 최대의 장점입니다. 그것은 혼탁한 오늘날의 영성의 흐름에서 볼 때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영성학자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는 그의 책에서 영성의 현대적 기후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습니다. 첫째, 의식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에 대한 거부와 관심의 결여, 둘째, 내적이며 심리학적인 자기 초월에의 욕망, 셋째, 삶의 전체성(평화, 정의, 해방, 환경 등)에 대한 관심.8) 기독교의 전통적 영성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현대인들은 동양종교나 심리학에서 그 대체적 영성을 찾으려고 동부서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종교, 예를 들면 인도의 요가나 불교의 선불교가 서구에서는 아주 인기입니다. 서구의 교회가 그 많은 영적 구도자를 잃고 있는 이유는 지나치게 의식적이고 제도적인 방향으로만 발전하여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영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제도주의와 의식주의에 대하여 동양종교는 인간의 자기 초월적 가능성으로 현대인에게 신선한 호감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종교의 특징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의 중요성입니다. 동양종교는 기독교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이나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일어날 어떤 환상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강조점은 오로지 불립문자, 교외별전, 견성오도, 직지심경의 즉각적이며 초월적인 자기 성화의 영성입니다.

동양종교의 영성적 특징은 한 수도승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잘 나타납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의 시간이요 여기 앉아 있는 우리가 바로 부처이다. 당신이 부처가 되는 것은 저 멀리 인도에 있었던 석가모니의 보리수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다.9) 이 현재성(nowness)과 즉각성(immediacy)을 내용으로 한 영성적 체험주의(spiritual experientialism)가 동양종교의 영성적 세계입니다.

심리학은 동양종교와 함께 현대인을 전통적 교회의 영성에서 빼앗아 가는 또 하나의 영역입니다. 초월적 명상(T.M)은 인도의 요가에서 나와 현대 과학으로 무장한 뒤 빠른 속도로 현대인을 파고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명상은 그 체험자들에게 어떠한 신앙고백도 어떠한 자기 포기나 위임도 어떠한 제자도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을 비워 생각의 근원과 청정한 마음의 상태로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체험자들로 하여금 범죄율을 감소시켜 사회악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이 또한 체험자들로 하여금 마음을 편하게 하여 자기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그렇지 않았으면 잃지 않았을 영적 구도자들을 교회의 오류 때문에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의식주의와 제도주의가 가장 큰 오류입니다. 동양종교나 심리학적 영성은 결국 전통적인 기독교의 형식주의를 거부하면서 종교의 핵심인 영성은 잃지 않겠다는 현대인의 생존을 건 종교적 자구책입니다.

전통적 기독교의 구도자들을 타 종교에 뺏긴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성서 본래의 영성으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성서 본래의 알맹이는 뒷전에 미뤄 놓고 껍데기만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껍데기가 싫어 교회를 떠났지만 종교적 알맹이(영성)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교회 구도자의 회복은 구도자들에게 알맹이를 회복시키는 회복이요, 성서적 영성의 뿌리 곧 케리그마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앞으로 이 교회 밖에서 대체적 영성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일부 신학자는 성급하게 이 일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성서 본래의 영성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신학자나 영성 지도자는 교회 밖에서 특별한 영성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서 안에 흐르는 영원한 생수의 영성을 언제든지 제공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서 밖으로 나가는 영성은 어쩔 수 없이 자기 도취적이 되고 자기 계발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기 의식 내부에 있는 어떤 심리적인 자기 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영성은 성서적인 영성이 아닙니다.10) 별세의 영성은 한편으로는 타종교, 심리학으로 쉽게 달려가는 잘못된 영성을 바로 잡고 한편으로는 영성에 관심이 없는 세속적인 현대인을 끌여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과 성화와 행복에 이르게 하는 케리그마의 영성입니다.

 

(2) 사도적 영성

 

별세의 영성을 영성의 유형에 따라 분류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기독교 영성은 결국은 하나입니다. 성서에 뿌리를 둔다는 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어떤 모양이든지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영성은 Spirituality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 영성은 다릅니다. 그것을 말한 사람과 역사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영성은 spiritualities입니다. 이 Spirituality와 spiritualities 사이에 많은 긴장과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그 다양성에 따라 영성을 분류하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11) 그 중에서 에드워드 키네르크(Edward Kinerk)의 신학적 분류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회 신부인 그는 세상과 역사에 대한 태도에 따라 네 가지 유형의 영성으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아포패틱(apophatic)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세상과 역사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하는 영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세상과 역사의 기능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영성이 세상을 악하다거나 역사를 무의미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강조점은 세상과 역사 밖의 세계입니다. the Cloud of Unknown(불가해의 구름)이나 십자가 요한의 영성이 그 예입니다.

둘째는 신의 도성(city of God) 형의 영성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하면서도 역사에 대해서는 아니오 하는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지만 그 변화는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만 일어납니다. 그 공간은 매우 배타적입니다. 수도원의 영성이 대표적인 영성입니다.

셋째는 예언자적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세상에 대해서는 아니오 하면서 역사에 대해서는 합니다. 세상은 반드시 변화받아야 할 곳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능합니다. 예언(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성, 그것이 예언자적 영성입니다. 마틴 루터 킹의 영성이 그 예입니다.

넷째는 사도적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세상과 역사에 대하여 모두 하는 영성입니다. 세상도 긍정하고 역사도 긍정합니다. 개인도 구원(회심)해야 하고 사회도 변화(진보)시켜야 합니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이 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둘 사이에는 이분법적 구분이 없습니다. 변화의 능력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계와 역사는 변화될 수 있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영성입니다.12)

별세의 영성이 이 중에 어디에 해답하는지 한 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별세의 영성에는 우선 아포패틱(apophatic)한 면이 있습니다. 글자 자체가 별세(別世),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별세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을 의미한다면 별세는 전형적인 아포패틱 영성입니다. 별세의 영성에서 많이 쓰이는 말은 하늘입니다. 만일 이 하늘이 인간의 삶을 넘어선 초월적인 실재를 의미한다면 별세는 또한 영락없는 아포패틱 영성입니다. 가령 그리운 하늘 고향이란 설교에서 이중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향은 인간이 상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입니다. 고향은 언제나 좋은 곳으로 추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인간은 땅의 고향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고향을 찾아도 옛 고향이 아닙니다. 실망만 하고 돌아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고향은 바로 하늘 고향입니다.(우레, p. 206.)

 

그러나 김균진이 옳게 본 것처럼 이중표의 하늘은 단순한 피안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 하늘은 죽음의 세계에 참여한 영원한 생명의 세계요 오늘 안에 이미 시작한 미래의 세계입니다. 별세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 속에 잉태된 부활의 생명이듯이 하늘도 오늘 안에 배태된 미래의 영광입니다(신학, 아포패틱 pp. 152-154.). 이런 점에서 별세는 아포패틱 영성이 아닙니다. 굳이 아포패틱하다면 카타패틱(cataphatic) 안에 있는 아포패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별세는 신의 도성의 영성도 아닙니다. 이 세상과 역사를 함께 긍정하되 하나님이 변화시키지 못할 어떤 공간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중표의 별세가 자기를 죽이는 영성이요, 그것도 힘써 지켜야 할 개인의 성화적 과제라고 할 때 수도원의 금욕주의 정서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별세는 수도원주의는 아닙니다. 실제로 이중표가 성 안토니와 이세종 선생을 언급하고 자기 몸을 바쳐 평생 기도하고 살았던 옛날 성자들을 많이 흠모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금욕주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지고한 자기 부정과 순교적 삶 때문입니다. 별세가 수도원적 금욕주의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은 것은 별세의 영성이 건전한 성서적 영성에 세워져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13)

별세의 영성이 이 네 가지 분류 중에서 가장 가깝게 느끼는 것은 사도적 영성입니다. 우선 사도적 영성은 세상과 역사에 대하여 모두 긍정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키는 영성입니다. 이중표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로서 역사 속에서 영적인 나눔의 사명을 다할 뿐 아니라 나눔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신에 반역하는 세력에 대하여 경고하고 나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하며 나눔 운동에 앞장서서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나눔의 신비를 알고 그 뜻에 동참하게 됩니다(목회, p. 282.).

별세는 이 세상과 역사를 철저히 긍정합니다. 그 속에서의 나눔과 변화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그 사명에 반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에게 경고하고 싸우기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별세의 영성은 예언자적 영성입니다.14) 물론 그 예언은 투쟁을 위한 예언은 아닙니다. 세상과 나누기 위한 예언입니다. 세상과 상관없이 혼자 거하는 영성, 세상의 고난에 무관심하는 영성은 성서적 영성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과의 나눔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나눔입니다. 최고의 나눔은 역시 복음의 나눔입니다. 케리그마의 복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나눔입니다. 그런 점에서 별세의 영성은 예언자적이고 또한 사도적입니다.15)

 

(3) 한국적 영성

별세의 영성이 한국인에 의해 한국적 분위기 가운데 한국 교회를 배경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영성이 마치 서구 교회의 전유물처럼 인식되고 있는 이 때 성서에 기초를 두고 세계와 호흡할 수 있는 새로운 영성이 한국인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별세는 한국을 사랑하는 목회자에 의해 한국 교회 안에 던져진 한국적 영성입니다.16)

별세가 한국적인 것은 우선 그 이름 때문입니다. 별세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익숙한 언어입니다. 그 뜻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누가 죽었을 때 한국인은 누구 누구가 별세했다고 말합니다. 이 쉬운 일상 용어가 신학 혹은 영성신학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름과 함께 그 분위기가 한국적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좋아할 리 없지만 오랜 세월 고난 속에 살아온 한국인에게 죽음은 낯선 세계의 이상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삶과 죽음 사이가 가까운 한국인에게 죽음은 마치 옆에 있는 친구와도 같습니다. 묘지가 있는 곳에 마을이 가깝다는 유대인 속담처럼 한국인의 무덤도 마을에서 멀지 않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땅에 삽니다. 죽음 속에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괴로운 세상, 벗어나고 싶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인의 심성은 지적이라기보다 감성적이고 실제적이라기보다 유토피아적이며 현세적이라기보다 초월적이고 땅에 대한 관심보다 하늘에 대한 관심이 더 높습니다.17) 별세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정서와 통합니다.

별세가 한국인의 정서와 통하는 것은 다만 그 분위기가 한국적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별세의 구조가 한국인의 영성적 구조와 비슷합니다. 한국인의 영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저는 한국인의 영성은 오랜 세월 한국 땅에 있었던 종교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고 하는 유동식 교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의 영성은 오랜 세월 한국인 대중의 마음을 형성해왔던 종교 간의 상호작용과 그 영적 유산에 의해 형성되었다.18)

그리고 그 종교로 그는 샤머니즘, 불교 그리고 유교를 들었습니다. 만일 이 세 종교, 그리고 이 세 종교 간의 상호작용이 한국인의 영성이라면 별세는 이 세 종교와 어떤 의미로도 연관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세 종교가 가진 어떤 면과 별세의 어떤 면이 각각 연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샤머니즘에서는 주로 신과의 열광적인 합일(esctatic union with God)이라는 면에서, 불교에서는 주로 개인적 체험주의(individual experientialism)라는 면에서 연관되며, 그리고 유교에서는 주로 제자도를 위한 엄격한 자기 훈련(self-discipline for discipleship)이라는 면에서 연관됩니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가장 오랫동안 한국인의 심성과 영성을 형성한 한국인의 종교입니다. 이 샤머니즘이 신과 가진 합일을 목표로 하고 그 합일로 인한 황홀경(ecstasy)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도 샤머니즘을 a complex of archaic techniques of ecstacy라고 정의했습니다.19) 별세가 샤머니즘과 연관된다는 것은 별세가 샤머니즘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별세가 하나님과 만나는 지고한 기쁨을 말하고 천상의 삶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말할 때 한국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에 빠져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가령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체험이 그것입니다(엿새, pp. 148-158.). 변화산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행복의 체험으로서 샤머니즘의 체험과 내용과 구조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엿새 후의 체험을 별세가 말할 때 그 체험의 현상은 한국인에게 아주 익숙한 체험이요 한국인 모두가 동경하는 체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만큼 하늘을 좋아하는 민족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에게 하늘은 어떤 공간적 실재가 아니라 종교적 피안입니다. 그래서 별세가 하늘이 열린 예수(우레, pp. 8-17.), 하늘의 우렛소리(우레, pp. 27-41.), 그리운 하늘 고향(우레, pp. 202-211.)을 말할 때 한국인 청중들은 그 말을 아주 익숙하게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서의 하늘과 다른 개념의 하늘을 생각했을지라도 친숙하게 듣다보면 별세의 하늘로 인도되는 접촉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접촉점의 배후에는 샤머니즘이 있다는 것입니다.

별세는 체험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불교적 체험주의와도 만납니다. 불교 특히 선불교는 깨달음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스즈키는 이러한 체험을 불교의 radical empiricism or experientia-lism이라고 불렀습니다. 맛보고 보고 경험하고 사는 모든 것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각(覺), 곧 깨달음의 체험으로 인도한다. 개인적 체험은 불교 철학의 기초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급진적 경험주의의 종교이다.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불교는 깨달음의 경험을 얻는다20) 별세가 불교와 연관된다는 것은 별세가 불교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두 세계가 한국인의 종교적 체험적 정서를 매개로 하나로 만납니다. 아중표의 별세체험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받는 성령의 체험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체험한 자각적 체험도 아니요 면벽수도를 통해 얻는 자기 득도, 자기 해탈의 체험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의 체험적 구조는 불교나 별세나 공통적으로 한국적입니다. 이중표 목사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느 날의 체험담은 하나님을 지식으로써가 아니라 감정으로 만나는 한국인의 정서의 극치를 보여줍니다.21)

별세는 또한 자기 훈련에의 강조를 통하여 유교와도 만납니다. 유교는 도덕적 자기 수신을 통하여 군자가 되는 데 그 목적을 둡니다. 군자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수신제가의 과정들을 통하여 도덕적 자기 완성의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 자기 훈련은 단계적이며 평생의 과정을 걸쳐 일어납니다. 이를 위해 가장 많이 권장되는 방법이 독서입니다. 책을 읽고 암기하고 토론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가늠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며 자신을 교육하고 진보하게 했습니다. 서당은 그것을 위한 공부방입니다.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교회 안에서의 높은 성경공부열도 그 뿌리에 있어서 이 유교적 자기 훈련과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유교적 자기 훈련은 도덕적 완성뿐 아니라 신분 상승까지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별세의 자기 부정과 영적 훈련은 유교의 그것과는 다른 주제입니다. 그러나 맥락은 같습니다. 자기 성장을 위해 강하게 자기 부정을 요구하면 한국인들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유교적 자기 훈련에 익숙해 온 한국인들에게 별세의 자기 부정과 자기 훈련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별세는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로 인하여 한국인의 심성과 영성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에 대해 잘 받아들이고 쉽게 감동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별세적 은총 말고도 한국인의 감성과 영성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3. 별세의 과제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별세의 영성은 많은 장점과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도상의 신학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말하는 자나 연구하는 자는 별세를 이루었다고 말하지 말고 겸손히 별세를 이루어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좀더 성숙한 별세를 위하여 세 가지 과제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1) 모델화

 

신학을 명사로 보느냐 동사로 보느냐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별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9장 31절에서 별세신학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된 별세는 우선 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텐 엑소돈 아우투, 그의 별세(the exodus of him),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의 별세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본래의 별세는 명사입니다만, 공동번역은 명사로 번역했고 개역성경에는 동사로 번역했습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멀지 않아 에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공동번역).

그러나 이 예수의 죽음을 개역성경에는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하고 동사형으로 번역했습니다. 저는 개역성경의 번역이 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별세는 문자가 아니라 그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별세에 대하여 연구하고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과연 별세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별세는 기본적으로 세미나하고 포럼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별세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오리겐이 신학자는 기도가 진실한 사람이다(A theologian is one whose prayer is true)라고 말했을 때 신학자가 기도를 토론하고 세미나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실제 기도하지 않으면 진정한 신학자가 아니라는 의미로 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기도하는 것인 것처럼 별세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별세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별세의 청중들이 고민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그것이 성서적이고 또한 한국적인 정서도 가지고 있어서 좋은데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천 방법을 일러주든지(교육화) 아니면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으면 보여달라는 것입니다(모델화).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별세를 말하는 사람들이 별세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별세를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별세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도원 운동과 그 영성이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진한 감동을 사람들의 가슴마다 새긴 이유는 수도원의 신학이 깊고 장엄하고 오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철저히 부인되고 헌신되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처럼 살지 않고, 그 시대의 수도자들의 눈물겨운 신앙고백으로부터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물질화된 현대의 신학과 이론으로만 수도원 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오류가 이런 것입니다. 누구나 수도자처럼 살지 않으면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을 비난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그들처럼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성 안토니를 우리가 쉽게 매도하지 못하는 것은 그는 85년 동안이나(20~105세) 이집트의 사막에서 목숨 걸고 홀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금욕주의다, 종교적 영웅주의다를 따지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영성을 몸으로 사는 사람의 권위처럼 강한 권위는 없습니다.

따라서 별세 영성의 첫 번째 과제는 별세를 살고 별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별세를 말하는 사람들이 별세를 살고 그를 모델로 한 또 다른 사람이 별세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별세되는 별세의 재생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교회사에 숨어 있는 별세의 사람들을 발굴하고 그들로부터 겸손히 배우며 별세 포럼이나 별세 세미나 등을 통해 별세를 살고 있는 오늘의 사람들의 고백과 간증을 듣고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삶을 따라가는 삶의 순교자화, 삶의 모델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사람의 영웅적 별세보다는 작고 많은 사람들의 별세가 더 소중합니다. 별세의 성패는 별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2) 신학화

 

별세의 영성이 성서 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는 신학이 되려면 성서와 신학의 뿌리로부터 날마다 그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로마인의 이야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만, 로마가 카르타고의 한니발 같은 명장이 없었어도 1천 년 왕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사람이 아닌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말해주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시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상이나 신학은 창안자 한두 사람에 의해 그 승부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시스템으로 승부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을 12제자에게 남기는 시스템을 만듦으로써 복음의 전승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칼빈은 갔지만 기독교 강요는 개혁교회의 시스템을 제공했습니다. 똑같은 시대 휫필드와 존 웨슬리가 같이 부흥운동을 했지만 웨슬리의 부흥운동만 남은 이유는 그가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남기고 제자를 남기고 신도회를 남기고 감리교라는 시스템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사역이 역사에 남은 이유는 그가 특별히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작은 형제단(order of friars minor)과 보나벤추라라는 걸출한 제자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의 이용도가 실패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영성을 신학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자도 삼지 않고 그의 영성을 객관적으로 검증해줄 두터운 신학층도 없었으며 또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용도의 실패는 시스템의 실패입니다.

별세의 영성은 현재 창안자의 신앙고백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고백이 모든 사람의 신앙고백이 되도록 개방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개인적 신앙체험이 성서에 근거한 영적 체험으로 보편화될 수 있느냐, 어떻게 그것이 더욱 성서적이 되고 더욱 신학적이 되어 보다 더 강한 영적 무기가 될 수 있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한 개인의 신앙고백에만 의존한다면 그 이후의 별세 영성은 전망이 없습니다. 별세를 연구하는 그룹과 학교 시스템, 그리고 별세 세미나와 포럼이 개발되고 지속되어야 할 필요가 거기 있습니다.

 

(3) 교육화

 

별세의 신학화는 자연스럽게 교육화로 이어집니다. 신학화가 모델화가 되는 과정에 교육화가 있습니다. 신학은 가르쳐야 하고 영성은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 경우에 모두 필요한 것이 교육화입니다. 별세를 가르쳐야 할 필요성은 이중표 목사 자신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설교나 공부로는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 훈련은 인격적 관계 없이 훈련되지 않습니다. 또한 훈련은 보여줘야 합니다.(교육, p. 21.)

 

별세를 가르칠 때 삶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스템으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단계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모든 영성 모델들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가르쳐지지 않은 영성은 도태되고 맙니다. 그 모델들은 프랜시스 모델, 베네딕트 모델, 이그나티우스 모델 등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별세는 어느 날 갑자기 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설교로서의 별세가 어느 날 갑자기를 말할 때 은혜는 되지만 어느 날 갑자기를 과정화, 훈련화하지 않으면 제자는 없습니다. 과정의 신학적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웨슬리의 christian perfection 개념입니다.

웨슬리도 올더스케잇 체험처럼 어느 날 갑자기를 체험했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체계를 갖춘 것은 그것이 가르쳐지고 과정을 만들어 단계적으로 실시될 때였습니다. 조지(L. George)는 웨슬리의 christian perfection을 여섯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의인, 중생, 초기 성화, 점진적 성화, 온전한 성화 그리고 영화가 그것입니다.22) 별세가 교육화되려면 이렇게 별세를 과정화해야 하고 그것이 가르쳐져야 하며 교재화되어야 합니다.

교육화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들보다 먼저 목회자들이 별세로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국 목회자 세미나에서 목회자들이 별세의 메시지를 듣고 감동받고 도전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얼마나 별세적 삶을 살고 얼마나 별세적 목회를 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중요한 것은 측정되지 않고 점검되지 않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 세미나가 별세의 군중들을 만든다면 몰라도 별세의 제자를 만든다면 부적절한 수단임이 분명합니다. 제자는 대상화된 군중들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솔하게 삶을 나누는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급한 것은 한 지교회의 별세 제자화가 아니라 목회자 제자화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무릎을 꿇지 않은 제자들이 그 시대를 살려낸 것처럼 별세로 무장한 목회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 시점에서 별세 영성의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지금까지 이중표의 별세를 영성과 목회적 입장에서 살폈습니다. 별세는 훌륭한 영성신학적 요소와 목회적 현장성을 갖추었습니다. 그것은 맑은 성서의 케리그마 샘에서 흘러나와 교회 현장을 은혜로 적시고 한국인의 영성에 호소할 뿐 아니라 저물어 가는 세계 교회에도 들려줄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쉘드레이크(Sheldrake)는 「Spirituality and History-Questions of Interpretation and Method」을 마치면서 지난 20년간 세계 교회를 주도했던 영성과 영성신학의 흐름을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배타적이 아니다. 기독교의 다른 종파 심지어 다른 종교의 영성까지 받아들이는 포괄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면서도 신학적이다. 신학적이라는 말은 영성을 이론화, 추상화, 형이상학화한다는 말이 아니라 영성의 근거를 보다 깊이 성서에 세우고 2천 년 교회사의 주류적 영성과 호흡을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내면적 성숙을 넘어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전인적인 성숙을 이룬다. 넷째는 인간의 내면적 문제에만 매달리지 않고 삶의 전체성 곧 신앙적 삶의 공적, 사회적, 도덕적, 우주적 영역까지 관심 갖는다.23)

이로 볼 때 한국인에 의해 태어난 별세신학은 그 분명한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세계를 품는 더 큰 포괄성을 가져야 하며 신학의 허구와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더 신학적이 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에 충실하면서도 더 폭넓은 전체 신학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20세기 한국 교회적 세팅에서 지극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한 한국인 목회자에게서 시작된 별세신학, 그의 삶으로 줄기차게 외치고 그의 죽음으로 커다란 감동을 준 별세신학이 하나의 별난 신학이 아니라 한국 교회를 물량주의, 상업주의, 세속주의에서 건져내 2천 년 전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작은 도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