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영성
장경동 목사 (대전중문교회)
요즘 교회를 들여다보면 목사다운 목사를 찾아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정치를 보면 정치인 같은 정치인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교육 현장을 보면 교육자 같은 교육자를 찾아보기 어렵고, 예술가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정말 예술가다운 예술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왜,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본래의 모습을.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치인은 정치가다운 모습을 찾으면 되고, 목사님은 목사님 같은 본래의 모습을 찾으면 되고, 예술가는 예술가 같은 본래의 모습을 찾으면 되고, 교육자는 교육자 같은 본래의 모습을 찾으면 됩니다. 항상 문제는 본래의 모습과 본질을 잃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간단합니다. 본래의 모습, 본질을 회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주님이 이 곳에 오실 때까지 세상 없는, 천하 없는 목사님이 나타나셔서 천하 없는 소리를 해도 변치 않는 목회의 기본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애니카 소렌스탐이 스윙을 하면 그 폼이 탁 나오는 것처럼 목사님은 딱 말씀의 폼과 기도의 폼이 똑같이 나와야 합니다. 말씀이 좋았다, 안 좋았다, 기도가 잘됐다, 안 됐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항상 그 말씀, 그 기도 일정한 기본을 유지하고 계속 가야 된다 그 말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특별히 지금 이 시대에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기본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가 부흥회를 매주 다니면서 느끼고 항변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보통 7시 30분에 집회를 하면 7시까지 오라고 합니다. 30분 동안 찬송을 뜨겁게 합니다. 그리고 30분 찬송이 끝나면 들어갑니다. 그러면 담임목사님이 나오셔서 종을 땅 치고 “묵도합시다” 해서 사회를 30분을 봅니다. 그러고 나서 강사님이 나와서 2시간 동안 설교를 합니다. 결국 예배는 3시간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도는 장로님 대표 기도로 3분밖에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예배 속에 기도가 없어졌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기도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예배 11시에 시작하지요. 빨리 끝나면 12시이고 늦게 끝나면 12시 30분, 40분입니다. 1시간 30분 예배를 드리는데 기도를 몇 분 했나 보십시오. 묵도 빼면 역시 장로님 대표 기도 3분입니다. 그것도 목사님이 3분 넘지 말라고 해서 3분 이내입니다. 기도가 없어졌습니다. 대예배, 새벽 예배에도 기도가 없습니다. 예배는 하루에 세 번씩 드리는데 기도가 없어졌습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기도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 목사님이 가르치실 때 “기도는 호흡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기도는 우리의 간구다”라고 정확하게 가르칩니다. 기도가 호흡이라면 숨을 쉬듯 기도해야 하는데 호흡이라고 가르쳐놓고 안합니다. 기적이 따로 없습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숨 안 쉬고 기도하니까 그것이 기적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약에서는 사무엘을 꼽을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 무슨 죄입니까? 기도하다가 쉬는 죄! 잘 보세요. 기도하다가 쉬는 죄로 본다면 우리는 일생을 죄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무엘은 기도하다 쉬는 것을 죄로 본다면, 우리는 기도하다가 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차이입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이 기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해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쉬지 말라! 왜냐하면 쉬면 죽으니까! 호흡이 멈추면 죽듯이 기도가 멈추면 죽으니까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도가 가르쳤어요.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님이 가르쳤습니다. 서로 교제하는 일을! 교제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 다음 “떡을 떼며.” 여기서 말하는 떡은 그냥 먹는 떡도 되지만 성찬, 성만찬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매일 이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성만찬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초대 교회의 목사님은 뭘 가르쳤느냐 하면 교제, 떡, 기도를 가르쳤는데 전혀 힘썼다고 합니다. ‘오로지’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전혀’를 바꾸었습니다. 간단히 기도합니다. 이 ‘전혀’를 ‘간단히’로 바꿔서 “간단히 기도하고 떡을 떼기를 전혀 힘쓰니라”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전부 먹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살만 쪘습니다. 한국의 큰 교회나 개척 교회나 전부 교회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전혀 먹기를 힘씁니다. 거기다 큰 교회마다 전부 교제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심지어는 다방보다 더 잘해 놓았습니다.
기도는 간단하게 하고 떡을 떼기를 전혀 힘쓰고 교제하기를 전혀 힘쓰니까 뭔가 되는 것 같은데 허전합니다. 자, 이것이 계속 지나가면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목사님이 그렇게 기도를 잘 안하니까 이 기도의 연약함이 교인들에게도 파급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장로님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야 그래도 목회자니까 기도로 말씀으로 원하든 원치 않든 사는 사람이니까 그런다 하더라도, 이 어른들은 6일 내내 자기들 사업 하시다가 주일에 대표 기도 한번 해야 하는데, 이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엄청 받습니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기도 책을 삽니다. 기도 책을 전부 사서 대표 기도 하는 법을 쭈욱 읽습니다. 읽고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가 아니라 그것을 적습니다. 제가 1970년도에 은혜 받고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장로님들이 대표 기도를 그냥 눈 감고 했습니다. 어쩌다 한 번 눈뜨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대개 그런 분은 교회에 자주 못 오시지만 헌금은 많이 하는 분을 목사님이 의도적으로 시키고 싶어해서 하는 분들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변화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건상 되신 분들, 그러니까 이런 분들은 바쁘게 생활하다가 대예배 와서 대표 기도하려니 부담되어서 적어 가지고 와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적어서 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숨을 적어서 쉬냐는 것이지요.
기도는 대화이고 호흡인데 다 물어보면 기도 못한다고 합니다. 기도 잘한다고 하는 분 거의 없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시키면 교회 안 나온다고 합니다. 왜 호흡을 못한다고 합니까. 이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기도가 오해되고 있는데 기도를 기도답게 안하고 기도를 성시 낭독으로 만들어놨어요. 전부 기도 책을 보고 멋있는 말을 가져다 하고, 다 외울 능력이 없으니 뭔가 적어서 하는데 제가 뒤에서 들어봐도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그 말이 얼마나 멋있는지.
상투적인 용어가 있어요. ‘생사화복, 하늘 보좌, 거룩하시며’ 등등 이렇게 담임목사인 내가 들어봐도 나는 저렇게 못하겠다 하는 그런 말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제가 아버지한테 “아버지, 돈이 필요한데 만 원만 주시면 좋겠어요” 합니다. “뭐하려고?” “학용품 사야 합니다.” “그래, 여기 있다.” 이렇게 타 쓰면 되는 것이지, “한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시고, 입덧의 말로 못할 고통을 지나, 생사의 갈림길에 선 산고의 고통을 지나, 오늘도 이 자식이 잘되기만을 위하여 불철주야 애쓰시는 아버지, 만 원만 주시옵소서” 하면 아버지가 “넌 무슨 돈을 이렇게 멋있게 달라고 하냐?” 그러실까요? “너 뭐 잘못 먹었냐?”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일들 속에 아주 중요한 내용과 본질을 잊어버린 채 현상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같이 고민해보자는 얘기입니다.
기도는 성시 낭독이 아닙니다. 기도는 미사여구를 계속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 심정을 말이 되건 안 되건 하나님 앞에 그냥 토로하는 것입니다. 입을 지으신 이가 언변에 감동이 되겠습니까? 입을 지으신 이가 내 말주변에 감동이 되겠습니까? 내 중심에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대표 기도 나온 장로님이 한 3분 울다 내려가면 누가 그 기도를 못했다고 하겠습니까?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얼마나 좋습니까? “거룩하신 아버지여, 나는 불의와 토색을 하지 아니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이레에 두 번을 금식하며 하루에 세 번씩을 기도함을 감사하나이다. 또 저기에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얼마나 더 잘합니까? 그런데 세리는 그 옆에 서서 아무 얘기 안했습니다. “하나님, 이 죽일 놈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마디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세리를 의롭다 하셨고 그가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본질이 우리 삶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는 그것입니다. 기도를 안합니다. 죽어라고 안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큰 문제는 기도와 말씀을 흘려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꾸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합니다. 안 됩니다. 천하 없는 위대한 목사님이 오셔서 천하 없는 위대한 얘기를 해도 기도와 말씀 외에는 안 됩니다. 그게 목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베드로가 뭐 했습니까? 교제하고 떡을 떼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3)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를 하니,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뒤집어 보세요. 기도를 안하니까 기사도 없어지고 표적도 안 나타납니다. 다시 기도를 하면 기사도 나타나고 표적도 나타난다 이겁니다. 기도가 죽으니까 능력도 죽습니다.
계속해서 47절을 보니까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시게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니까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고 칭송을 받게 되고, 칭송을 받게 되니까 믿는 자가 많아져서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흥은 그냥 교제해서 떡을 떼서 나오는 부흥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부흥은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날 교회 안의 성도들을 보면서 세 가지를 찾았습니다. 조화가 있고, 생화가 있는데, 생화에는 온실 출신과 야생화가 있습니다. 지금은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드는지 봐서는 구분이 안 됩니다. 가서 비벼봐야 압니다. 그게 조화예요. 조화는 변하지 않고 시들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조화가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양이 그냥 나오면 양이에요. 이리가 그냥 나오면 이리예요. 그런데 이리가 양의 탈을 쓰고 나오면 그건 뭐지요? 그것을 연구해 봐야 하나요? 그것은 양 같은 이리예요. 그런데 잘 보세요. 양은 그냥 양이에요. 이리는 그냥 이리예요. 양의 탈을 쓴 이리는 양 같은 이리예요. 그런데 양 같은 이리하고 양하고 뭐가 다른가요? 양은 굳이 양 같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양이니까. 그런데 이리는 양 같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리니까.
그러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굳이 기도를 많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하니까. 기도를 많이 안하는 사람이 기도를 안하니까 하는 것처럼 하려는 거예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공부하려는 척을 안합니다. 잘하니까.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공부를 하는 척을 하는 거예요.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은 굳이 헌금 많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많이 하니까. 헌금을 많이 안하는 사람이 헌금을 많이 하는 척합니다. 그냥 만 원 내면 될 것을 꼭 천 원짜리 10장을 바꿔 내더라고요.
그런데 그 모습이 교인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 목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게 오늘 내 모습이더라고요. 저는 새벽 예배 나가 기도하고 일어나 가려 하다가, 교인의 문 여는 소리가 나면 도로 앉아 기도합니다. 왜인 줄 아세요? “내가 일어나 갈 때까지 우리 목사님 안 일어나고 기도하시더라”는 소리 들으려고요. 저는 양 같은 이리가 어디 나쁜 데 따로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요소 요소가 내 속에 있더라고요. 저는 보통 헌금 낼 때는 그냥 내다가 많이 낼 때는 꼭 이름을 써서 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사례비를 드려도 도로 다 헌금 내시더라” 그 말 들으려고요. 뭔가 내가 스스로를 잘 보이려고 하는 순간, 그것이 벌써 탈을 쓰는 것이 됩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말고 기도하고, 헌금 내는 모습을 보이려 하지 말고 헌금 내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조화의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유난히 열심을 내는 교인들은 일단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목사님이 계실 때와 계시지 않을 때 열심이 달라지는 사람은 일단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 앞에서의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 잘 보이려고 하는, 척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제가 설교를 하다가 돌아봐지더라고요.
지금 한국 교회의 심각한 병이 있다면 뻥입니다. 뻥을 성경은 누룩이라 합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을 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남자만 오천 명이었더라.” 떡 7개, 물고기 2마리로 4천 명 먹이실 때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남자만 4천 명이었더라.’ 왜 성경은 여자와 아이를 뺀 채 남자만 셌을까요? 그게 그 당시 사람 숫자를 세는 문화입니다.
요즘 시대 비추어서 보니 적어도 성경을 쓰는 저자들은 그대로 기록하고 싶은 의도들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요즘 저 사실을 가지고 성경을 썼다면 뻥이 엄청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유~ 2-3만 명은 족히 되겠던데.’ 2-3만 명이 아닌 연인원 10만 명으로 썼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부풀리려고 하는 성향이 우리 속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큰 교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부풀려도 표가 안 나니까. 어차피 누가 와서 세어 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개척 교회는 부풀려도 한계가 있습니다. 한 30명 모였는데 천 명 모였다 하면 뻥도 어지간해야죠. 대한민국에 있는 5만 개 교회가 교인 숫자를 다 보태니까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더라고요. 종교인 숫자가 인구보다 더 많아요. 뻥이 너무 세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의식을 못합니다. ‘내 삶 속에 누룩이 만연되어 있구나.’
그런데 왜 성경은 사실대로 하려고 했을까요? 성경과 말씀 속에서 내 사고가 멀어졌다는 것에 우리는 의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뻥을 치는 것일까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크면 옳은 것이고, 크면 성공한 것이고, 크면 어떤 불법도 합법화된다는 세상식 사고가 뿌리 깊이 만연되어 있기 때문이죠. 어떤 목사님이 “지금 우리 교회가 작으니까 이단 소리 듣지, 크기만 하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갑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큰 착각을 하는 것이 커도 이단은 이단인 것이죠. 작아도 아닌 건 아닌 거고 긴 건 긴 거고, 커도 아닌 건 아닌 거고 긴 건 긴 거죠. 숫자가 커지면 이단이 아니고 작으면 이단인 거고,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크나 작으나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크나 작으나 옳은 것은 옳은 것이어야지, 틀린 것이 많아짐으로 인해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목사니까 믿는 사람들하고만 교제를 했습니다. 목사가 만나는 사람이 목사이고 교인이잖습니까? 여러분이 엄청 많은 분들을 상대하는 것 같아도 그 분들이 다 교인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요즘 안 믿는 사람들과 만나는데, CTS, CBS에 나가다가 MBC에 가니까 무슨 목사가 MBC에 가냐고 무지하게 말을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목사를 좋아하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목사를 안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목사님 설교는 일반적으로 싫어합니다. 설교를 하면 다 듣는 줄 알지만 안 듣습니다. 설교 시작하면 생각은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광고 시간에 돌아옵니다. 그것을 목사님이 모르더라고요. 듣는 줄 알아요. 무슨 얘기를 할 때 설교조로 하면, 훈계조로 하면 ‘너, 나한테 설교하는구나’ 하고 듣기 싫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신자든 비신자든 일반적으로 설교를 안 들으려 합니다.
“내용 있는 설교, 남는 설교를 해라, 그리고 재밌게 해라. 이도저도 아니면 빨리 끝내라.” 이것이 설교자의 3대 원칙입니다.
제가 안 믿는 세계에 들어가 보니까 참 감사한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목사가 한 명 나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인들도 좋아하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엄청 좋아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들을 좋아해서 교회로 옮겨와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12제자가 있었지만 이 사람들은 유대인의 사도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하나 구원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환상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도 못합니다. 안 갑니다. “더러운 것을 나는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세워서 이방인을 구원하는 사도로 쓴 것처럼, 저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방인의 목사로 불려진 것 같습니다. 딴 뜻 없습니다. 저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던져서 그들로 하여금 믿고 교회로 나오게만 하면 여러분은 계속 등록만 받으면 되잖아요. 아니, 어떻게 목사가 나 같아야만 된다고 그럽니까? 나 같은 목사, 너 같은 목사, 그 같은 목사, 이렇게 되어야지요. ‘다 바울이냐? 다 베드로냐?’ 그거 아니잖습니까? 그것처럼 다 내가 아니듯 너도 아니고, 다 너도 아니듯 나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는 역할이 다르니까!
제가 세상 사람들과 교제해보니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 쓰는 용어가 우리하고 다릅니다. 우리는 ‘할렐루야, 아멘’ 이런 용어를 쓰지만 그쪽은 욕이 표준어입니다. 뭔 말인지 잘 못 알아듣겠지요? 그냥 표정만 욕이에요. 한마디하고 욕하고, 한마디하고 욕하고……, 제가 그 용어 바꾸려고 지적해서 바꾸고, 지적해서 바꾸고 했습니다. “느낌표”에서 이경규 씨와 사회를 보는데 이 친구가 담배를 계속 피워요. 그래서 담배 끊게 했잖아요. 어쨌든 저와 만나는 바람에 담배를 끊었어요. 그들이 변화되고 있어요. 그 얼마나 감사합니까?
둘째, 일반적으로 표가 안 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표시가 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려운 일 당하면 하나님 앞에 맡기고 기도를 하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맡길 데도 없고 기도할 데도 없고 그냥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팍 자빠집니다. 이게 다르더라고요. ‘아하, 믿는다는 것이 좋구나.’ 우리는 어려운 일 있을 때 맡길 데가 있잖아요. 주님 앞에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맡길 데가 없습니다. 그냥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겁니다.
셋째, 죽었을 때 이 사람들은 노래를 이렇게 해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이~.” 안 됩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기진해서 죽는데, 기진한다는 것은 기가 다해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왜 사람이 눈 감고 죽는 줄 아십니까? 힘이 없어서 감고 죽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별것 아니지만 기운이 다 빠지면 눈이 천근이에요. 눈꺼풀 올리기도 힘든 사람이 대소변 가려내겠어요? 못 가립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다 죽었는데 돌아오면 안 되지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죽으면 “며칠 후 요단강 가서 만나리”, 오지 말라 이겁니다. 내가 갈 테니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자는 내세가 있습니다. 갈 곳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불신자는 현세만 있고 우리 신자는 현세와 내세가 있습니다. 조화는 내세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제가 “느낌표” 하면서, 착한 일한 사람을 찾아서 황금 배지를 달아주는데 목사님 한 분이 그 배지를 달았습니다. 지금 23개를 달아줬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80% 이상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저는 왜 하나님이 저에게 그 프로그램을 하라고 했는지 알겠어요. 전부 찾아놓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제가 거기서 느낀 것이 세상은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 착하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착한 만큼 세상은 착하다고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경규 씨가 “목사님, 놀랍네요. 착한 일하는 사람이 다 예수 믿는 사람이네요. 이거 MBC에서 얘기해봐야 다 편집될 거라 소용없지만 CTS나 CBS에는 목사님이 얘기하십시오. 전부 황금 배지 받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착한데 세상 사람들은 왜 우리를 착하다고 안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지금 언론 플레이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을 전혀 알리지 않는 거예요. 실제는 착한데 다 안 착하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수준만큼 우리가 못 미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80점 맞으면 우리를 착하다 할 것 같은데 그들은 80점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100점을 요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요구하는 점수가 너무 높아요. 그걸 우리가 못 맞춰주고 있어요. 왜냐하면 온실 출신이기 때문에. 온실 출신이라는 것은 생화는 생화인데 이것이 온실에서 커서 향기가 없어요. 꽃이 향기가 없어요. 지금 보면 철도 없이 꽃이 나와요. 그런데 향기가 없어요. 온실 출신이라 그렇습니다.
지금도 아파트 단지에 핀 야생화 한 송이가 얼마나 향기가 진동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꽃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한국 교회에. 큰 교회 성도일수록 온실 출신이 많아요. 온실 출신이 많다는 것은 설교 속에 고난, 책망도 없는, 무슨 얘기를 하면 나를 바꿔야 하는데 교회를 바꾸어 버려요. “기도하세요” 그러면 “아멘” 해야 되는데 기도하라고 해서 안 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 안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바꿔요. “우리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십시일반으로 헌금합시다” 하면 “아멘” 해야 하는데 “헌금 내라 해서 교회 안 나가” 그러니까, “헌금하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전혀 부담이 없는 교회입니다. 붐비는 교회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책망이 없고 혼내는 것이 없고 그저 잘한다만 하다 보니까 교인들이 다 당뇨에 걸렸어요. 그래서는 아무 맥이 없습니다. 그냥 교회는 나오는데 “환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내 주만 위해 살리라” 해야 하는데 “환난과 핍박이 오면 안 나가리라” 이런 마음입니다. 오늘날 우리 목회 현장이에요.
한국은 그래도 나아요. 미국은 교인 내보내려면 책망해야 돼요. 한국은 본인이 교회를 나가는데 미국은 목사를 내보내요. 그러니 목사님들이 위험한 설교를 안해요. 본인들은 모르지요. “목사님, 부탁이 있는데요, 절대 이혼 설교는 하지 마십시오. 색깔에 대해서는 설교하지 마십시오. 큰일납니다. 여기 절반 이상이 이혼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색깔은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나 이혼은 왜 설교를 해야 하느냐? 내가 이혼했다고 해서 이혼 설교 안하면 안 됩니다. 이혼할 사람을 위해서라도 설교해야지요. 이미 해버린 나는 어쩔 수 없다지만 예방 차원에서라도 더 세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해도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혼을 막고 가정을 지켜 가게 해야지,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다 안하면 무엇을 설교할 것이냐 말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지금 이 시대에 여러분에게 은혜를 줄 사람이 누구인가를! 제가 볼 때는 없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를 줄 수 있을까, 다른 목사는 주지 못해요. 하지만 예수님은 올 수 없어요. 우리한테 맡겨 놓고 가셨잖아요. 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못 받으면 자기 자신밖에는 은혜를 줄 사람이 없어요.
오늘 우리가 부흥이라고, 성장이라고 하는 이 좋은 것 때문에 잃어가고 있는 것 하나가 야생화입니다. 마치 온실 출신이 최고 좋은 교인인 것처럼. 그러나 우리나라가 초대 교회였을 때 예수 믿는 사람은 아주 적었죠. 그렇지만 그들은 정말 신앙다운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때 사람들 속에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각인이 되었느냐, 잘못을 하면 ‘설마 믿는 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 그랬습니다. 좀 지나 교회가 부흥되었어요. ‘아이, 설마 믿는 사람이 그랬을까’, 좀더 지나니까 ‘믿는 사람도 똑같더구먼.’ 더 부흥했어요. 교회가 엄청 많이 생겼어요. ‘이제는 믿는 놈이 더 나쁘구먼.’ 그러니까 숫자가 많아지면서 현상이 좋아지면서 본질을, 향기를 자꾸 잃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왜 내가 갈등을 느끼냐면 북한은 믿는 사람이 아주 적습니다. 그들은 전부 야생화예요. 조화가 없어요. 뭐하려고 조화를 해? 안 믿어버리지. 온실 출신도 없어요. 그저 있는 것이 야생화예요. 이 사람들은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입니다. 진짜 많이 있어요. 수는 적은데! 북한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죽을병에 딱 걸리잖아요. 그는 이렇게 기도한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내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사인이 왔어요. 감사합니다.” 남한의 예수 믿는 사람이 죽을병에 딱 걸리면 “이럴 수는 없나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럴 수는 없나이다” 합니다. 저는 다만 한 면을 얘기하는 것뿐이에요.
하나님이 남한 기도, 북한 기도 들으실 때 어떠실까요? 나는 죽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꼭 감사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성화된 믿음이 남쪽 교인들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북한 교인들은 죽음 자체를 감사해요. 왜냐하면 땅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봐야 일하는 것이고 죽으면 천당 가는 것이니 죽는 게 낫기 때문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6~17),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바울이 죽고 싶다는 것은 현실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 바울은 북쪽 교인들하고 수준이 같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같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목회에 근본적으로 어떤 변화가 와야 합니다. 아버지 에게 탕자가 있는데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모태 신앙입니다. 탕자가 나름대로는 기도를 했을 것 같습니다. 모태 신앙이니까. 돈이 점점 없어지자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자꾸 물질이 없어집니다. 축복해 주시고 지켜 주십시오. 술 먹고 여자들하고 즐기는 것을 안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나름대로는 기도를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이 안 돼요. 포지션이 잘못됐어요. 탕자의 위치가 잘못되었으므로 기도가 응답이 안 돼요. 이런 탕자가 회개하여 아들이 되었습니다. 탕자와 아들의 기도가 다릅니다. 탕자는 이렇게 기도했어요. “아버지,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소서.”
아들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품꾼의 하나로 써 주세요” 했더니 목욕 시키고 옷 입히고 신발 신기고 반지 끼우고 잔치 해줬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을 보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저절로 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본질이고 이 모든 것이 현상이거늘 우리는 본질 기도를 안하고 현상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인 잘못이라고 생각 안합니다. 우리 목사들이 잘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가르친 대로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교인을 만나면 “집사님, 평안하시지요? 기도 잘되시지요?” 본질을 물어야 하고 본질을 설교해야 하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현상만 묻고 현상만 설교하니까 전부 교인들이 기도 제목 적어내면 “요즘에 기도가 안 돼요.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하는 제목의 기도가 없고, “목사님, 기도 좀 해주세요. 그 땅 팔려야 돼요”,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그 건물 사야 돼요” 이런 제목만 있습니다. 왜 교인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한 기도는 안하고 이런 기도만 할까요? 이것이 교인들 잘못입니까? 우리 목사들 잘못이 아닙니까? 목사님들 만나면 그럽니다. “장 목사, 평안하지?” 이렇게 묻는 목사님이 없고, “장 목사, 부흥 잘돼? 예산은 많이 올라갔어?”라고 묻습니다. 목사들 의식구조 속에도 탕자 스타일로만 물어요. 달라는 기도는 탕자식 기도예요. 아들식 기도는 “뜻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한번 해봅시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오리까? 무엇을 하오리까?”라고 제발 내 기도 하지 말고, 말하는 기도 하지 말고 듣는 기도를 해봐요. 탕자 기도는 “주시옵소서”이고 아들 기도는 “어찌하오리까?”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날 회개합니다. 그건 회개가 아니라 반성입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것은 사과이지 회개가 아니에요. 우리는 사과와 반성과 회개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그랬지 반성하라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과해라 하지 않았어요. 네가 잘못했다고 뼈저리게 느꼈으면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탕자는 자기가 주도했어요. 아들은 주님이 주도했어요. 그러니까 신앙고백은 한가지입니다. “주여”입니다. 우리가 “주여” 하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은 “주여” 하면서 내용은 “나여”입니다. 그 증거를 봅시다. “주여” 하면 나는 종이라는 사실은 이런 뜻입니다. 첫째, 종은 의지가 없습니다. 누구의 의지로 살아야 합니까? 주인의 의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자주 대꾸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사역이 ‘주여’, ‘나여’ 둘 중 어느 것입니까?
둘째, 종은 소유가 없습니다. 종이 돈 벌면 누구 것인가요? 까먹으면 누구 돈인가요? 주님의 것입니다. 벌어도 주님 것이고 까먹어도 주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주여”가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오늘 우리가 조화나 온실 출신이 되다 보니까 구원을 너무 값싸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시편 23편에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주님이 주가 될 때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나 ‘내가’가 “주여”가 될 때 ‘나여’가 됩니다. 내가 “주여”가 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 기도가 “주여”가 되었으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씀하옵소서” 해야지 자꾸 대듭니까? 믿음이 있을수록 더 이상해집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그래도 하나님이 두렵고 눈치라도 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듭니다. 대화나 간구라 하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대통령과 대화하는 것을 상상하면 됩니다. “각하, 각하는 청와대에 계시기 때문에 민생을 아실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에 대한 각하의 견해가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안심할 수 있도록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답변이 옵니다. “제가 청와대에 있어서 모르는 줄 알지만 뉴스를 보고 신문을 봐서 압니다. 걱정 말고 계시면 그렇지 않아도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순서로 해 나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들어야 하는데 자기 얘기만 하고 들을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기도를 내가 말만 하지, 듣습니까? 탕자 기도는 자기 기도이고 아들 기도는 듣는 기도입니다. 아들 기도는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소서. 주님 뜻대로 쓰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것이 아들입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을 보면 아들 목사님은 찾아볼 수 없고 전부 탕자입니다. 그리고 목회가 안 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위치의 문제입니다.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그러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 자체가 천국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으므로. 큰 교회들이 큰일도 했지만 문제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죠.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님이 재능에 따라서 맡겼어요. 다섯 개, 두 개, 한 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에 따라 맡기셨습니다. 모두 주신 것만큼 남겼으면 똑같이 칭찬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남기는 것은 신경 안 쓰고 왜 나는 하나밖에 안 줬냐에 관심을 둡니다. 능력이 있어야 받지, 능력도 없으면서 받아서 뭘 하려고요.
다섯 개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팠습니다.” 장사꾼이 땅을 왜 팝니까? 농사꾼이에요? 이것은 자기 소질에 안 맞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갔다는 것은 자신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바로 순종한 결과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 식으로, “나여” 한 것입니다.
주님이 와서 회계를 할 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줍니다. 그래서 11개가 됩니다. 빈익빈 부익부입니다. 큰 교회는 새 신자가 와서 늘어나고 작은 교회는 그나마 있는 교인 없어질 것입니다. 왜 그렇죠? 엉뚱한 짓을 하니까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 안 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엉뚱한 짓을 할 경우입니다.
목사가 기도하고 말씀 보고, 말씀 보고 기도하면, 내가 받은 것대로 남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비교하느냐 말입니다. 다 조용기 목사님이냐, 다 김삼환 목사님이냐 말입니다. 아닙니다. 조용기 목사는 조용기 목사이고 김용기 목사는 김용기 목사인 것입니다. 하나 받아서 다섯 개 남기면 잘한 게 아닙니다. 이런 성장을 불법 성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성장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두 달란트 받아서 다섯 달란트 남기니까 문제입니다. 두 개만 남겨야 하는데! 그것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하는 가면 때문에 말씀의 본질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적극적 사고방식은 담고 있으나 적극적 사고방식이 성경은 아닙니다. 나는 적극적인 방식을 엄청 좋아하고 엄청 부러워하지만 성경은 적극적 사고방식을 담고 있지, 적극적 사고방식이 성경은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은 안 되는 것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적극적 사고방식은 안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많이 비슷한데 조금 달라요. 그러나 성경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래 떡은 안 만들어 먹었어요.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했어요. 그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떡이 떡이 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생선이 생선 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돌이 떡 되면 세상이 이상합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 너무 팽배해지면 90%는 좋은데 10%가 이상해집니다. 아무리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안 되는 것이 없고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잘 보세요. 오늘 목사님들은 이런 설교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안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됩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인생 버릴 수 있는 사람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게 신앙의 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신앙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예수 믿으면 안 되는 게 없고 잘못되는 게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예수 믿으면 다 잘되고 다 좋더냐 말입니다.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만 안 믿었으면 인생 괜찮게 살 사람입니다. 정 할 일 없어도 학원 원장 하면 잘살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 만나서 인생 버린 사람입니다. 장가도 못 갔지, 먹고살기 힘들지, 고생 많이 했지, 얻어맞고, 감옥 가고 했습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 믿었으면 왕 될 사람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예수 믿어서 인생 버린 사람은 거의 없고 예수 믿어서 다 재미 본 사람이 많아서 한국 교회가 복잡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는 것들을 감수할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적인 손해든, 과정의 손해든 그런 각오와 자세는 되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성장도 중요하지만 아닌 성장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장이라고 하는 것 위에는 과정도 뭣도 없는, 정말 세상 말로 꿩 잡는 게 매요, 돌아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그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서울은 곧장 가야지요. 돌아가면 부산입니다. 예수님은 목적 달성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정과 동기가 똑같이 옳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의도는 “주여” 하는 고백이 바로 나오면 기도하는 것도 탕자가 아닌 아들의 기도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기도 속에 “주시옵소서”가 많이 사라지고 “어찌하오리까? 말씀하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들 목사님이 많아져야 아들 성도가 많아지는데 탕자 목사님이 너무 많으니까 탕자 교인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닐까요? 탕자는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시옵소서” 하고, 아들 기도는 “품꾼의 하나로 써 주세요”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너무 현상 위주로 떠 있는 교회가 많고 우리 삶이 떠 있어요. 이것을 좀 가라앉혀야 돼요. 거품을 빼고 누룩을 빼고 뻥을 빼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저 한 달란트 받아서 한 달란트 남기면 흡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 다섯 개 받은 사람을 따라가려고 하는지, 그러려면 능력이 되어야지요. 그러나 다섯 개가 다섯 개 남기려면 최선을 다해야 해요. 두 개가 두 개 남기려면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하나가 하나 남기려면 역시 최선을 다해야 해요. 하나는 살살 해서 남는 게 아닙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힘들고 개척 교회는 개척 교회대로 힘들어야지 큰 교회는 수월하고 개척 교회는 힘들다든지, 개척 교회는 수월하고 큰 교회는 쉽다든지 그것이 아니라는것입니다. 똑같이 힘듭니다. 왜냐하면 능력의 차이입니다. 그 능력에 맞춰 남기면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합니다. 열왕기상 13장으로 가 봅시다. 33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왕이 사울입니다. 이 사울이 처음에 잘나가다가 변질됐어요. 여러분, 사람이 변질되면 죽습니다. 변치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변하지 않으면 성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울을 폐하고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잘나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변질되었습니다. 솔로몬이 변질되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정권을 계승할 때 당시 군대장관이 여로보암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입바른 소리를 하니까 솔로몬은 자기를 고치지 않고 피난 갔다가 죽고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다시 와서 말합니다. “네 아버지 솔로몬이 처음에는 정치를 잘하다가 요즘에는 잘 못했다. 네가 온건하게 정치를 하면 우리가 다 네 밑에 들어가 신하가 되어 일하겠다.”
르호보암이 원로들과 상의했습니다. 원로들은 그렇게 하라고 하고,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더 세게 쪼아라. 네 아버지가 채찍으로 했으니 너는 전갈로 다스려라.” 그런데 르호보암이 노인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안 듣습니다. 어른 말을 들었어야죠. 제가 목회하면서 깨달은 노하우가 어른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말만 들으면 거의 망하지는 않습니다. 잘못되고 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을 안 듣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이든 선배의 말이든 잘 안 듣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이 나가서 나라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었습니다. 남유다는 두 지파, 북이스라엘은 열 지파. 그런데 문제는 둘이냐 열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나 우리나라 역사나 남쪽이 정통이에요. 북쪽은 비정통이고. 그러니까 남쪽은 제사장이 있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어서 신앙의 순수성이 유지되어 가는데 북쪽은 그것이 없으니까 제사장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사장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요즘으로 말하면 소명과 사명을 가진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아무나 자원하면 제사장을 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보시기에 악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보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의 자녀들을 보고 평가하고 심판합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세상이 흔들려도 우리만 딱 서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 역사적 근거로 소돔, 고모라가 죄가 많아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 고모라가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나라가 많이 잘못되었어도 끄떡없는 이유가 아직 신실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을 마지막 보루로 알고 자기를 지켜가시길 바랍니다. 내가 넘어지면 이 나라가 넘어지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한 괜찮다란 의식으로 부흥을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14장 1절, “그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이 아들이 병이 들어 버렸습니다. 아들이 아팠어요. 2절,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벌써 ‘변장하여’란 단어가 잘못됐잖아요. 변장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진실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변장하고 가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니라 그대의 손에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로 가라”(2-3절)고 합니다. “떡, 과자를 가지고 가라.” 여로보암은 제사장을 삼을 때 이런 것 갖고 있는 사람을 세웠다는 겁니다. 사람은 다 자기 식으로 살아간다고, 아무나 제사장을 자원할 때 여로보암이 이런 것을 받고 세우니까 이것을 갖다 주면 기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의 정신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입니다. 그 정신의 흐름 속에 그저 안수를 받고 나서 감사해서 주는 것과 이것을 주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내가 고침 받아서 감사하는 것과 감사 헌금하면 고쳐주는 것과 다릅니다. 여로보암이 제사장을 삼을 때 이런 것들을 받고 제사장을 삼으니까 너도 이걸 가지고 가면 그 사람이 안수해줄 테니 고침을 받아라는 것입니다.
5절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아들이 병듦을 인하여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저가 들어올 때에 다른 사람인 체함이니라.”
여기서 아히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목사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속에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까? 목사는 그 음성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왜 북이스라엘이 문제입니까? 이러한 잘못된 제사장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된 나라가 어떻게 소망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떡이나 꿀을 갖다주고 자원하면 아무나 제사장을 삼은 그 나라가 소망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윤리의 문제요, 윤리를 다스리는 것이 종교의 문제라면 신앙이 잘못되면 그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이 다 썩어가도 교회는 그래도 모습을, 짠 맛을, 소금을, 빛을 지켜가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주여”입니다. 주여만 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나를 종 부리듯이 부리면 되는데 이 “주여”가 “나여”로 바뀌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나여”를 “주여”로 바꾸는 것을 회개라 합니다. 이 땅 위에 내렸던 첫 번째 메시지가 “회개하라”입니다. “천국이 가까웠다.” 천국은 예수님입니다. ‘내가 네 안에 들어가서 네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니 회개하라’ 이겁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천국이 됩니다. 그러면 그분 뜻에 맞추어서 어디든지 내 능력에 맞춰서 이루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안에 계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가야 할 문제이지 이것이 무슨 배워서 될 문제이고 따라해서 될 문제입니까?
오늘날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 그 주님을 주인으로 바로 모시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내 인생을 내게 맞는 가장 바른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다섯 개면 다섯 개로 일하면 되는 것이고, 두 개면 두 개처럼, 하나면 하나처럼 남기기만 하면 됩니다.
문제는 두 개를 가지고 다섯 개 남기는 것인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불법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법 성공이라고 말을 안하잖아요. 그냥 성공이라고만 하잖아요. 그래서 커 가고 훌륭해짐에 따라 존경을 잃어버립니다. 성장 속에 꼭 따라가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존경입니다. 존경이 따라가야 합니다. 훌륭함 속에 존경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큰 사람도 있고 큰 교회도 있고 큰 부자도 있는데,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존경받는 목사가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존경하며 누구에게 존경을 받습니까? 큰 것, 훌륭한 것, 분명히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존경받는 것보다 절대 중요하지 않습니다. 존경받는 목사가 됩시다. 그것은 “주여”라고 고백하는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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