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Column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 유다광야에서

샬렘하우스주방장 2013. 9. 24. 18:26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 유다광야에서2012.01.29 18:12


다윗·엘리야… 성경 속 사람들은 왜 고독한 광야로 갔을까

오랫동안 내 영혼에 사무치게 그리운 곳이 있었다. 유다광야였다. 다윗, 엘리야, 엘리사,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영적 고향인 유다광야는 오랫동안 필자에게 꿈의 무대였다. 그러나 섭씨 40도의 폭염과 함께 남북으로 약 100㎞, 동서로 약 25㎞나 되는 황무지를 걷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유다광야는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 식지 않는 여름처럼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 유다광야는 성경적 영성의 중심무대였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위로는 벧엘, 실로, 아이, 옆으로는 베들레헴, 드고아, 엔게디를 지나 남쪽으로 헤브론, 아라드, 브엘세바에 이르는 이곳에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헤롯이 짓게한 헤로디온 장관

작년 7월, 몇 명의 목회자가 의기투합하여 마치 가나안 정탐꾼처럼 무장하고 길을 떠났다. 빵과 물, 배낭을 갤로퍼에 싣고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만 해도 길은 순탄한 듯했다. 팔레스타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새로 난 유대인 정착촌으로 가는 길은 잘 포장됐다. 베들레헴 입구의 수도원 앞에서 좌회전하여 시스 고개를 넘어 헤로디온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멀리 헤로디온의 위용이 들어왔다. 헤롯이 죽기 직전 신하들을 시켜 짓게 한 인공무덤,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헤로디온을 지나자 시련이 시작되었다. 형편없는 비포장도로가 시작된 것이다. 차가 흔들리고 먼지가 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국산 갤로퍼의 위력은 대단했지만 쉴 새 없이 흔들리며 움푹 파인 골짜기로 질주하는 차 안에서 내지르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벨트를 단단히 조이고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광야는 험해지고 날씨는 무더웠다. 보이는 것은 먼지로 덮인 하늘과 끝없는 광야뿐이었다.

그렇게 40분쯤 가자 멀리 하얀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려 보니 뜻밖에 요르단과 사해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광야의 끝이었다. 엔게디가 바로 발아래 있었다. 광야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엔게디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오른쪽에 키부츠 엔게디가 보이고 왼쪽에 엔게디 국립공원이 보였다. 롯이 떠나고 홀로 남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창 13:14)고 했던 곳인지 모른다.

엔게디 정상에서 조심스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구멍 뚫린 동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저 동굴 중 어느 곳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는지 모른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던 십황무지(삼상 23장), 엔게디동굴(삼상 24장), 하길라산(삼상 26장) 등은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다윗이 광야를 전전할 때 마온과 갈멜에서 만난 나발과 아비가일 이야기의 현장(삼상 25장)도 이 근방 어디일 것이다. 다윗은 분명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 하고 고백했을 것이다.

광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단지 사람이 살지 않는 버림받은 땅이 아니다. 그곳은 고독한 곳이다. 고독은 다만 외롭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침묵의 섬이다. 극단적 고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 과학자 미셸 시프르이다. 그는 지하 30m의 동굴에서 무려 205일 동안 음식과 읽을거리만 갖고 지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극심한 외로움을 느껴 86일째가 되던 날에는 자살을 생각했다. 그 고비를 넘기자 점점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156일째 되는 날 드디어 고독의 진가가 나타났다. 갑자기 그 자신이 얼마나 거짓되며 가식적인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면을 보려면 고독이 필요하다

고독은 우리를 거짓으로부터 해방시켜 단순한 존재가 되게 한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이 벌거벗고 선 곳, 그곳에 서면 우리의 거짓된 자아상이 폭로된다. 진정한 고독 없이는 진정한 자기 발견도 없다. 진정한 자기 발견 없이는 진정한 영적 삶도 없다. 모든 경건, 모든 기도, 모든 각성이 이 고독에서 나온다.

사막교부들의 이야기다. 한 수도자가 물을 항아리에 가득 부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보입니까?” 사람들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 후에 다시 물었다. “무엇이 보입니까?” 사람들이 말했다. “우리 얼굴이 보입니다.” 그렇다. 내면의 세계는 금방 보이지 않는다. 고독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토머스 머튼이 말했다. “고독은 자기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 고독 없이 진정한 친교도 없다. 고독과 친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윌리엄 맥나마라의 말과도 같다. “고독 없는 공존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란히 있는 것이다.”

성경의 사람들이 왜 광야로 나갔을까? 왜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격리되었을까? 왜 다윗은 그토록 많은 세월을 고독한 광야에서 헤매야 했을까? 왜 엘리야는 광야에서 죽기를 자청했을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 앞에 서야 한다. 너무 많은 것들이 있는 도시에서는 내가 가진 것이 적게 보인다. 그러나 광야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이 많아 보인다. 광야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대부분 불필요한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들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구원은 시험과 시련 없이는 불가능

‘벗기움’은 우리 입장에서는 ‘박탈’일 수 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새로운 ‘옷입기’일 수 있다. 반 젤러의 말과도 같다. “벗기움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박탈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는 새로운 과정이다. 비우는 것은 빼앗김이 아니라 새로운 채움의 시작이다. 인간에게 탈출은 곧 하나님에게 유입이다.” 따라서 고독은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할 많은 유혹과 투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월터 브뤼게만이 그의 책 ‘The Land’에 쓴 대로 성서의 땅은 네 가지 의미를 갖는다. 선물(gift)로서의 땅, 유혹(temptation)으로서의 땅, 과제(task)로서의 땅, 그리고 위협(threat)로서의 땅이다. 본래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땅이 선물임을 잊을 때 유혹이 되었다.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제를 주셨다. 그것이 말씀이요 계명이며 안식일이다. 그것을 지키는 데는 많은 위협과 공격이 있다. 그 공격을 이겨내기 위해 영적 싸움이 필요하다. 수도원 운동은 그 영적 싸움의 한 현장이었다. 사막 교부들이 말했듯이 구원은 시험과 시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영적 싸움으로 말미암는다.

낮의 광야가 아름답지만 밤의 광야는 더 아름답다. 쏟아지는 별빛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맞이한 아침은 경외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파수꾼의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는 행복한 축복의 시간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광야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그의 백성과 만나시고 그들을 호위하시며 보호하시고 눈동자처럼 지키신다(신 32:10). 유다광야는 예나 지금이나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려는 성도들의 영혼의 요람이요 하나님이 사람을 길러내는 영혼의 훈련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