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io_Column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5) 채리톤 수도원에서

샬렘하우스주방장 2013. 9. 24. 18:28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5) 채리톤 수도원에서2012.02.05 18:14


초기 동굴 교회, 수도자의 삶이 녹아있는 ‘영성의 샘’

순례 중 어떤 가이드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는 두 시간의 자유시간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자유시간입니다. 두 시간 후에 다시 만날 텐데 혹시 길을 잃으면 이렇게 하십시오. 먼저 그 자리에 멈춰 서십시오. 더 가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가던 길의 반대편으로 곧장 걸어오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처음 헤어진 곳에서 만날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교회가 그리고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길을 다시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창기 교회 신앙인들이 보여준 삶의 자리는 우리가 길을 잃을 때 돌아갈 영적 출발지이다. 초대 교회 수도원이 그 중 하나다.

아직도 험한 동굴서 평생 기도만 하며 살아

필자의 수도원에 대한 관심은 오래 전 예루살렘에서 유학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유다광야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어느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여기저기 구멍 뚫린 절벽의 동굴에서 아직도 기도하는 수도자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가슴은 뛰었다. 어떻게 그 험한 동굴에서 평생 기도하며 살 수 있을까?

그들과 세상이 만나는 접촉점은 오로지 밧줄에 연결된 바구니 하나였다. 그 바구니에 전달된 최소한의 음식으로 겨우 목숨을 연장하며 기도에만 전념하는 이름 모를 수도자의 치열한 삶이 안일에 빠진 나를 자책하게 했다.

그 후 유다광야 수도원에 대하여 쓴 고고학자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히브리대의 이츠하르 히르쉬펠트 교수가 쓴 ‘The Judean Desert Monasteries in the Byzantine Period’였다. 이 책을 들고 시간만 나면 답사를 다녔다. 여리고 근처 와디 켈트에 있는 성 조지 수도원(주후 525)에도 가고, 기드론 계곡 끝자락에 있는 마르 사바 수도원(주후 478)에도 갔다.

히르쉬펠트에 의하면 비잔틴 시대 유다광야에는 확인된 수도원만 73개 달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수도원은 두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하나는 와디 켈트 지역(25개)이요, 다른 하나는 기드온 골짜기(20개) 지역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이곳에 생존에 필요한 물이 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 성지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보지 못 한 수도원이 있었다. 그것은 주후 330년 이스라엘에 최초로 세워진 채리톤 수도원이었다.

작년 여름, 큰마음 먹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예루살렘 북쪽을 빠져나와 여리고 쪽으로 내려가다가 차에서 내려 성 조지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다. 거기서 골짜기를 타고 서북쪽 정상까지 올라가야 했다. 길은 험하고 날씨는 더웠다. 길 양쪽에는 이스라엘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불리는 와디 켈트 협곡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버티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좁고 험한 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독거형 수도원을 부르는 ‘라우라’란 말은 본래 ‘좁은 길’ ‘벼랑’이란 뜻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물이 흐른다는 것이었다. 이 물은 골짜기의 정상 부근, 곧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에서 가까운 파라 샘에서 나온 것이다. 5시간은 족히 올랐다. 샘의 근원에 거의 도착했을 때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것을 알았다. 더운 여름에 파라 샘을 오아시스 삼아 피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갔다. 뼛속까지 시원했다. 드디어 파라 샘 근처에 도착했다. 파라 샘은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렘 1:1)의 옛 자리에 위치한 유대인 정착촌 알몬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바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자 채리톤이 세운 채리톤 수도원이다.

주후 330년 이스라엘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

채리톤 수도원은 동굴이었고 러시아정교회가 그 동굴을 포함한 교회를 세웠다. 절벽을 끼고 돌아 동굴로 갔을 때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이 주후 330년,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초대 교회 성도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이다.

채리톤이 이곳에 정착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아시아 이고니온에서 태어난 그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주후 270∼275) 때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다가 황제가 죽자 꿈에도 그리던 성지순례를 떠났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에서 행복한 성지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무더위 피할 곳을 찾았다. 그때 한 동굴이 눈에 띄었다. 동굴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았다. 그때 강도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죽은 사람의 시체에서 돈과 귀중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체를 한쪽으로 밀어 넣더니 포도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동굴 깊은 곳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채리톤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강도들이 나간 후 어디선가 뱀 한 마리가 나오더니 포도주병 속에 독을 뿜고 사라졌다. 한참 후에 다시 들어온 강도들은 남겨 놓고 간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들은 곧 죽었고 채리톤은 그들의 시신을 땅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동굴을 정결케 한 후 광야의 나무를 꺾어 십자가를 세웠다. 이것이 채리톤이 세운 수도원의 시작이었다.

채리톤이 시작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은 강도의 굴혈이었던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나 오늘이나 수도자들의 삶은 가난하기 짝이 없다. 정교회 수도사는 전기 없이 촛불만 밝히고 산다고 했다. 세탁도 흐르는 파라 샘에 쓱쓱 비벼 빨면 된다고 씩 웃었다. 많은 문헌의 증거에 의하면 유다광야 수도자들은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대부분 수도자들은 하루 두 끼만 먹었고 그나마도 광야에서 난 야생풀을 먹고 살았다. 그들은 침대나 이불이 없는 맨바닥(돌 위)에 누워 잤고, 소금에 절인 빵을 빗물에 받아먹었다. 하루를 삼등분하여 8시간 기도, 8시간 노동, 8시간 쉬는 생활을 규칙화했다.

유다광야 수도자들, 기도 뿐 아니라 사회공헌

수도원의 형태는 독거형(라우라)과 공동체형(시노비움)이 있었으며 유다광야 수도원은 대부분 절충형이었다. 이들의 생활은 주중에는 주로 동굴에서 침묵으로 기도하고 주말에는 공동체에 내려와 함께 예배했다. 이미 이때 수도원의 질서가 생겨나 수도원장(아바)이 있었고 수도자들은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수도원장(연장자)에 대해 복종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그들은 기도만 하고 산 것이 아니었다. 노동도 중요시했다. 노동은 주로 대추야자 잎사귀로 바구니를 만들거나 진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일이었고 이것을 여리고 등지에서 판매하여 생활에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이웃의 어려움에도 무관심하지 않았다. 마르 사바 수도원의 사바는 어느 해 베들레헴 지역 사람들이 심한 가뭄으로 고생하자 직접 로마 황제를 찾아가 물질의 후원을 받아오기도 했다. 유티미유스는 사라센(아랍) 부족장의 아들을 전도해 최초의 아랍인 감독이 되게 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선교의 한 장을 열었다.

5세기초 칼케톤에서 교회 회의가 열렸을 때 유다광야 수도자들은 ‘단성론’(예수의 신성만 인정)에 반대하고 ‘양성론’을 주장하여 교회사 발전에 공헌하기도 했다. 그들의 삶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닮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자원하여 가난하게 사는 것이었다. 기도와 가난, 철저한 자기 부정의 삶을 산 그들이 마지막 남긴 것은 성경 한 권과 지팡이 하나 그리고 치열한 백색 순교자의 삶이었다. 오늘 한국교회도 이 수도원 정신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강도의 굴혈이었던 채리톤 수도원

채리톤 수도자, 성지순례 중 무더위 피해서 동굴로…. 그 때 강도 두명이 들어오더니 시체에서 돈과 귀중품을 뒤지고 포도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뱀이 나타나 포도주병 속에 독을 뿜고 사라졌다. 다시 들어온 강도들은 남겨 놓고 간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 숨어서 지켜보던 채리톤은 그들의 시신을 땅에 묻고 피로 얼룩진 동굴을 정결케 한 후 광야의 나무를 꺾어 십자가 세웠다.

한신교회 목사